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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by 나경sam 2020.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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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주 금요일에는 선미언니네 엄마가 돌아가신 강릉으로 조문을 다녀오고

이번주 토요일은 수연이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삼성병원으로 조문을 다녀왔다.

딸의 계원예고 동기 엄마들의 부모님들이 한겨울 숲속 커다란 나무 쓰러지듯

그렇게 돌아가셨다.

 

용진이네 외할아버지도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고

그 집은 부고도 안알려서 조문도 못했고 미사중에 짬짬이 기도만 할 뿐이다.

 

부모님들이 그렇게 돌아가신다.

우리 아버지도 벌써 6년이 되어간다.

 

은진이가 고등학교 1학년때 돌아가셨고 승범이는 아직 군대에 있을 때다.

집에서 쓰러지시고 딱 2주동안 일반 병실에 계시다가

중환자실 들어가신지 일주일만에 가셨다.

 

전북대 병원에 계실 때 두번 갔었고

군산 의료원 중환자실에 계실 때 두 번이나 갔나 싶다.

 

부모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는 과정을 보는 것은 잠시였지만 고통스러웠다.

저 모습이 과연 내가 그전까지 알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맞는지 의심스러울만큼

병원에 누워 계신 지 이주만에 아버지의 다리는 근육이 다 빠져나가서 종아리가 축 늘어져 있었고

얼굴은 광대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말라 있었다.

아버지는 이미 죽은 사람같았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증거는 도서관에서 책이 연체되었으니 얼른 반납하라는 독촉문자뿐이었다.

도서관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빌려다 보신 분이라 쓰러지시기 전 빌려 온 책이 집에

몇 권 있었던 것이다.

중환자실에 계신 아버지의 면회를 하고 나와서도 배는 고파서 엄마가 해 주는 밥을 먹고

군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집에 올라왔었다.

 

돌아가신 월요일 새벽은 계원예고 기말고사가 있는 날이라서

은진이를 어떻게 해야 되나

시험을 보게 해야 되나 어떻게 해야 되나 판단이 서질 않아 학교에 보냈더니

선생님이 돌아가도 된다고 그랬다고 은진이만 기차를 타고 혼자 군산으로 내려왔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자기 자식 시험은 보게 하는 게 부모 노릇인줄 알고 미련하기 그지없는 짓도 했었다.

아니 몰랐었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신게 내 평생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는 어린애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고 슬펐었나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게 적응이 안돼서, 아버지가 이 세상 사람 아닌게 실감이 안나서

목소리 크기가 손자들 경기 일으키게 할 정도로 크신 분이라

언제까지 소리 질러가시면서 오래오래 사실 줄 알았는데

인생이 허무하였다.

 

수연이 아버지 돌아가신 것도 뵌 적은 없었으나

허무하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은진이가 그랬었다.

그 전까지는 빈센트 병원 앞을 버스 타고 다녀도 저 밑에 장례식장이 있을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할아버지 상을 치르고 보니 병원 어딘가에는 장례식장도 있고 우리처럼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거라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세상은 큰 잔칫집같아도 어느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2014년 겨울에 알았다.

 

슬픔이 지나갈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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