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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일기

"오사카를 보고 나니 - 교토는 시골이었네"

by 나경sam 2018.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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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를 보고 났더니 - 교토는 그냥 시골이었다"


나도 방학 - 딸도 방학




엄마 보러 또 교토에 온 딸

나를 보고 멀리서 뛰어오는게 아직도 세살이다.

지난달에 이어 3주만에 또 왔다. 이번이 세 번 째

이젠 혼자서 버스도 잘 타고 알아서 잘 내리고 혼자서 동네도 잘 돌아다니는 동네 주민이 된 것같다.


둘이서 교토를 벗어나서 오사카로



카와라마치 역에서 "한큐"를 타고 오사카 "우메다"역까지 가는 길

400엔으로 특급을 타고 4월에 교토에 와서 처음으로 교토를 벗어났다.

오사카에는 교토의 카모강은 강도 아닌것 같은 이런 큰 강이 흐르고 있었다니

마치 한강을 보는듯한 - 도시 분위기도 서울이랑 많이 닮았다.





"헵 파이브 관람차"


관람차에서 본 오사카 시내 - 교토는 진짜 시골이었다/유적지가 많은 시골




"오사카 성 - 토요토미 히데요시 축성



오사카 주유패스로 무료 입장이 가능하지만 5시까지만 입장이 가능하므로 빨리 움직이는게 좋다.

1층에서 무료로 음성 안내 가이드 오디오를 대여해주기 때문에 그걸 신청해서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서 5층에서 내리고

다시 위로 올라가면 전망대





오사카 시내가 잘 보일 정도로 전망은 좋았지만 이미 더위에 졌다.

전망대에서부터 한 층씩 아래로 내려가면서 오디오로 설명들으면서 역사 공부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히데요시가 반가운 인물은 아니지만 역사는 어쨌거나 알아야 되고

역사를 모르면서 단순히 오사카 성의 모습만 보러 온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천천히 역사 공부 좀 했다.


우리에게는 원수이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전국 시대에 최고로 출세한 인물로 유명하다.

서민 출신으로 태어나 일본 조정 최고의 자리 "관백"까지 오른 인물이니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입신 출세의 아이콘같은 인물이고 한국인들에게는 이토오 히로부미와 함께 싫든 좋은 그 이름을

외우게 했던 사람이다.


나도 최초로 외웠던 일본인의 이름이 이 두 사람이었던것같다.

그만큼 한국의 역사에도 영향을 끼쳤던 - 그래서 한국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본인 두 사람은 이토오히로부미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닐까 싶다.


새로 들어 온 빵집 아줌마 중 한명이 "이토오" 상인데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 훅하고 들었던 기분이 바로 "이토오 히로부미"

뭐 그런 기분이지.


머리가 영민하고 꾀가 많아 섬기던 주인 "노부나가"의 마음에 들어 출세의 단초가 되었고

추운 날 "노부나가"의 신발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뎁혀서 준 일은 유명한 일화라고 한다.


타고난 잔머리와 똘끼가 합쳐져 토요토미히테요시는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고

조선뿐만 아니라 필리핀이나 인도에까지 나한테 복종을 해서 부귀영화를 누려라 뭐 그런 개 풀뜯어먹는 친서를 보냈다고 한다.

"이 무슨 똘마니짓인가" 싶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대부분 편지에 대한 답장은 없이 제대로 씹혔고^^

나한테 복종해라 라는 편지를 받은 나라들의 입장에서는

"야가 시방 뭔 소리하냐.토요토미히데요시 야가 뭐하는 얘여.뉘집 자식이여.그랬을 일이다"


자기가 무슨 알렉산더도 아니고

무려 세계 정복의 꿈을 꾼 사람은 아니었었나 싶다.

 다른 나라에서는 씹혔던 욕망을 조선에서 펼쳐 출병식을 했고

일본인들 중에서는 낯선 외국 땅에서 개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일본에서 죽자라고 했던 임진왜란 반대파들도 많았다고 한다.

오사카 성 오디오 설명에서 들었다. - 쫌 고마운 기분-.- 뭐지 이 건


어쨌거나 반대가 심했던 국내파와 전쟁을 일으켜 제압하고 그 기세를 몰아 조선으로 갔던 것


그때 반대했던 국내파가 좀 강했더라면 임진왜란은 일어나지 않았을것이다.

비극은 한 끝차이에서 시작된다.


임진왜란에 대한 명분은 "명나라"로 가기 위한 길을 트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의 몫이었고

연전연승을 거듭한 일본은 쭉쭉 명나라를 향해서 위로만 직진 - 縱 ( 종 ) 으로 만 직진 ( 橫 ) 횡은 없이

다행인건 한 도시를 점령하고 주변 도시들은 그냥 놔뒀기 때문에 조선의 입장으로서는 다시 결집력이 생길수 있었고

너무 위로만 치고 올라간 일본으로서는 너무 위로 치고 올라간 나머지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에서 대패를 당하고

보급이 끊어진것


선조가 삽질을 아무리 해도 이순신 장군이 버텨주고 이름도 모르는 "아무개" "막내" "개똥이" "이서방"들이 지켜준 덕분에

전쟁은 끝났고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는것이다.


교토에 있는 코무덤에 다녀 왔을 때 마음이 애달펐었다.

전쟁이 아니었더라면 평범하게 살았을 사람들

여름이면 모깃불 피워놓고 평상에 앉아서 호박잎에 밥을 싸먹고 저녁 일찍이면 자고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서 논일을 했을

평범했던 역사속의 한 인물 인물들이 전쟁을 만나 코만,귀만 떨어져 나와 치가 떨리는 일본 땅에 묻혀 있다는것


나는 그래서 비록 교토에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기 와서 기모노 입고 돌아다니는것은 좀 자제했으면 싶을 때가 있긴 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전쟁은 이순신이라는 위대한 장군을 만들었고

역사는 서로 맞물리는 톱니바퀴같은 것


 한시간 가량 오사카 성을 제대로 보고 걷는 오사카의 여름 저녁


지난 번 막내가 왔을 때는 얼굴이 익어서 다녔건만 이번주는 아무리 더워도 그때만큼은 아니었다.

바람도 개미똥구녁만큼 불어 주었고

교토보다 훨씬 높은 빌딩들이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교토는 유적이 많은 시골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안 오사카 투어


"도톤보리"

모두가 사진을 찍는 구리꼬상 앞에서 사진



타코야끼먹고 복잡한 길을 걷고 있다보니 어찌나 교토로 다시 돌아가고 싶던지

(무려 타코야끼도 교토보다 훨씬 비싸)

참 나 교토에서 지낸지 얼마나 됬다고 사람 마음이 그런거다.

서울에서 하루 시달린 기분이었다.

가고 싶어서 갔지만 서울에서 반나절 시달리고 나면 수원에 돌아올 때 화서동이 그렇게 반갑다.

딱 그 기분


얼마나 지쳤던지 딸이랑 나랑 저녁은 교토에 돌아와서 먹었다.

오사카에도 맛있는 집이 많건만 얼른 다시 교토로 가자 그러면서 돌아왔다.



그래도 돌아오면서 본 하늘





태풍이 오려고 그러는지 바람도 불고 하늘이 일본에 와서 본 하늘 중에서 가장 예뻤다.

아마 그동안 저런 하늘도 있었겠지만 내가 못본것이겠지


여름방학을 하고 본 저 하늘


평화가 뭐 별게 있냐 싶더라


저런게 평화지


내가 좋아했던 노회찬 국회의원에게  저 하늘을 보여주고 싶다.


영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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