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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일기

"앞만 보고 가면 잘 모르지만 문득 뒤를 돌아보면 얼만큼 왔는지 알게 된다"

by 나경sam 2018.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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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만 보고 가면 잘 모르지만 문득 뒤를 돌아보면 얼만큼 왔는지 알게 된다"


어머니가 내일 수술을 하신다.

내가 결혼할 때 어머님 나이가 56세였나 보다.

결혼하고 큰 애가 아직 애기였을 때 어머니 환갑을 했었고 칠순은 아이들 고모부가 살아계셨을 때 지리산 산장에서 가족이 모두 모여

여름 피서같은 칠순을 보냈었던것 같다.

어머니 칠순 때는 우리 가족이 춘천에 살고 있을 때였고 형님이 지리산 산장에 이불이 모자랄 지도 모른다고 미리 말씀을 해주셔서

그때 타고 다니던 우리 가족 승합차 "카니발"에 이불을 잔뜩 싣고 갔었던 기억이 난다.


항상 좁은 차를 타고 다니다가

(뒷자리에 세명이 나란히 앉아서 지지고 볶다가 카니발을 타면서는 한자리씩 차지하고 다녔다.그랫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특히 막내는 아주 좋아했었다. 뒷자리에 탈 때는 언제나 가운뎃 자리가 막내 지정석이었으니까 물론 그건 지금도 변함없다.

7인승 카니발을 타고 다닐 때를 우리 아이들은 가장 좋아했다.


그 차에 이불을 잔뜩 구겨넣고 춘천에서 부터 달려서 전주에서 식사를 하고

지리산으로 가서 또 하루를 잤고 다음날 아침 산장 식당에 가서 산채 정식을 먹었었다.


산채 정식으로 나왔던 밑반찬 중에 매실 짱아찌가 아주 맛있어서 식당에서 싸왔었는데

막상 춘천집에 가서는 잘 먹지 않아 버렸던 기억도 난다.


어머니 팔순은 작년

입시가 한참 치열했을 때 익산 한정식 집에서 치렀다.


입시를 치러야 되는 학교로 진입을 못하고 도시고속도로로 휙 빠져 버려서

길 위에서 산산히 날라가버린 정신을 붙들고 딸이랑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경찰에 전화를 하고

그래도 어찌어찌 수습을 해서 학교로 가긴 가서 시험을 치렀었다.

그날 입시를 치르러 실기고사장으로 뛰어 들어 가던 딸의 뒷모습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등나무 벤치에 앉아서 자기 자식을 기다리던 부모들의 얼굴과 시험을 끝내고 나와서 울던 아이도 기억이 난다.


어떤 남학생이 실기 시험 치르고 나와서 자기 부모 앞에서 안경을 벗으면서 좀 울었었다.

시험을 치를 때는 모두가 경쟁자이지만 밖에서 보면 누구나 내 자식처럼 안스럽고 짠해서

그 아이가 우는 걸 나도 조금 울면서 봤었다.

그래도 나중에 아이가 자기 엄마가 건넨 바나나를 먹는 걸 보고 좀 마음을 놓았었던 그 학교의 등나무 벤치

"그래 일단 먹어. 먹으면 또 살아지고 살아지면 또 잘 된다" 그런 마음으로 그 아이를 봤었다.


오후 늦게 치렀던 입시여서 그날 실기 시험 후 아이와 함께 달리던 강변 북로는 몹시 막혀 있었고


다음날은 어머니 아버님의 팔순을 치르러 익산에 가야 됬었고 마음이 몹시 바쁘고 짜증이 났었던 토요일이었다.


아무하고도 말을 하고 싶지 않던 그런 토요일 오후였었다.

딸은 그런 상황에서도 또 연습실에 가야 했었고 나는 시험을 본 후에 남편에계 전화도 안하고

그냥 달리다가 늦게까지 연락이 두절된 내가 걱정이 된 남편이 전화를 했었다.

전날 남편에게 내가 먼저 "내려갈 때 꽃바구니라도 해가야 되나" 그런 얘기를 했었기 때문에

남편은 입시에 대해서는 서로가 예민하니까 묻지를 않고 꽃바구니 이야기를 꺼냈었다.

남편의 입장에서는 입시 이야기를 물을 수도 없고(입시 때는 서로 눈치만 본다.그러게 되어 있다)

만만한게 꽃바구니 얘기였을거다.

어머니 꽃바구니를 꼭 해가야 되서 나한테 물어본게 아니라 자기도 딸이 걱정도 되고 어떻게 치렀는지

직접 못 물어보고 내 입만 바라보는 입장이었으니 돌려서 말한게 꽃바구니였었는데

내가 거기서 터져버렸었다.


남편 - "오고 있어..... 내일 꽃바구니는 어떻게 하지....."

나 - "지금 꽃바구니가 문제냐..... 내가 어떤 상황을 하루 종일 보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꽃바구니 얘기가 나오냐...."


남편의 꽃바구니 얘기에 나는 몹시 분노했었고 아주 짜증이 났었다.

하필 이럴 때 어머님 아버님은 생신을 하신다니,모든게 짜증스러웠었다.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그날 특전 미사를 율전동 성당에 가서 드리고 동네에 가서는 동생을 맥주집으로 불러내서

눈치라고는 약에 쓸려고 해도 없다면서 남편 욕을 하면서 맥주를 마시고 들어갔었다.

눈치가 없었던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고 결혼하고부터 쭉 이십년이 넘은 한결같은 부분이었는데도 그날은 참을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음 날 남편이랑 내려가서 팔순을 치렀었고

그게 다 불과 일년도 안된 이야기인데 아주 먼 옛날 이야기같다.

그때 생각했을 때는 과연 내게도 이런 날이 올 까 싶은 날들을 지금은 마음껏 누리고 살고 있다.


어머니는 내가 결혼을 막 했을 때도 다리나 허리 관절이 다 안좋으셔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

둘쨰 은진이를 낳고 나서 한달쯤이나 되었나

목 디스크 수술을 하셔서 오랫동안 입원을 하셨었는데 그때 내가 아버님과 번갈아가면서 어머니 간병을 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내가 해야 되는건가보다 그런 마음으로 한다고 나섰다가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누워 있는 사람도 힘들지만 간병인도 힘들다는걸 말로 안게 아니라 그 때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네살이던 큰 애와 한달 막 지난 둘째를 우리 엄마한테 맡기고 저녁에는 아버님과 교대를 했던 보름 정도의 간병 시간을 보냈을 때

스틱 차를 운전하고 다니느라 나도 무릅이 아파왔었다.


그때 간병을 해드린 걸 어머니는 진심으로 고마워하셨다.


목디스크 수술을 하셨을 때도 얼마나 고통스러워하셨는지- 수술하신 첫 날 병원에서 함께 지냈던게 나다.그래서 기억을 한다.

어머니가 당신 살아 생전에는 다시는 이런 수술을 안하신다고 큰소리를 치셨다.


사람이 살면서 큰 소리 칠 수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목디스크는 시작에 불과했고 무릎 수술도 하셨고 허리 수술도 하셨고 이제 또 허리 수술을 하시게 되는거다.


아니까 아는 만큼만 보이고 아는 만큼 고통도 예측이 가능하니 어머니는 두려우실거다.


나는 늘 우리 어머님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누구에게나 대 놓고 말하는 못된 며느리였다.

성격적으로도 어머니랑은 안맞는 부분도 있고 어머니가 나를 며느리로 봤을 때는 어머니 나이도 젊으셨고

기질도 은근히 세셔서 나는 어머니가 좀처럼 힘든 사람이라고 느꼈었다.


그런데 어디 나만 우리 어머니가 힘들었을까 싶다.

우리 어머니 입장에서도 어디서 저런게 며느리라고 들어와서 말끝마다 말대답을 하는지 아주 속많이 상하셨을거다.

어머니의 3남 1녀 자식들은 말 대답을 안한다.


어느새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



내일은 어머니를 위해서 묵주 기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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