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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일기

"시간의 흐름"

by 나경sam 2018.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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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바쁠 줄 몰랐었네"


지진이 크게 한 번 다녀 간후 간간히 흔들렸다.

작은 흔들림까지 대 여섯번쯤 흔들렸나 -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래 흔들리나 보다 그러고 자기까지 했으니 강심장이 된 것같다.


지진이 오고 여진이 와도 달라지는것은 하나도 없었다.


수업 테스트 수업 테스트 끊임없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렇게 죽기살기로 안해도 되는데

왜 나는 좀 편해지지를 못하는지 -.-

물론 그런 중에도 쉬는 날이면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고 일년의 이 시간을 정말 충실히 살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살고는 있으니

나중에 할머니가 되면 나는 아마 지금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을 두고 두고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간병인 붙들고

교토가 "어쩌구저쩌구" 하도 얘기를 해대서 간병인이 복도에서 다른 간병인 붙들고 내 흉을 볼지도 모른다.

"아니 저 할망구 나이 오십에 교토 가서 일년 지내다 온 주제에 한 십년쯤 산 사람처럼 맨날 교토 타령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니 지금의 일년동안의 시간을 십년은 산 것처럼 열심히 재미있게 살자

다시는 오지않을 시간이니


엄마가 다녀간 뒤로 곧바로 딸이 또 와서 삼박사일 지내다가 오늘 아침에 갔다.

4월에 딸이 왔을 때는 나도 적응을 못했을 때라 딸이 엄마처럼 나를 챙겨줬다.

심지어 자기 용돈으로 냉장고까지 채워주고 갔으니 그때는 내가 엄마가 아니라 딸이 엄마였었다.


딸이 돌아가던 날 빵집 앞에서 헤어질 때 울고 가던 딸을 볼 때 내 마음이 참 그랬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딸도 혼자서 잘 돌아다니면서 놀고 내가 쉬는 날은 함께 돌아다니면서 3박 4일을 보냈다.

혼자서 버스를 타고 집을 찾아왔으니 딸도 교토에 좀 적응을 한거지.


첫 날 함께 간 "이치란 라멘"




"이치란 라멘" 기본으로 먹었다.

특별히 추가한 사리는 없이 기본으로 먹었는데 블로그 후기들을 보면 이치란 라멘을 인생라면처럼 써놨던데

뭐 나는 그저 그랬다.


내 인생 라면 2호는 "너구리"다

"너구리" 라면 처음 나왔을 때 그 광고 노래 아직도 생각난다.


"쫄깃쫄깃 오동통통 노옹심 너어구리- 너구리 한 마리 몰고 가세요"

"너구리 좋아하는 사람은 너구리 라면만 먹습니다"


인생 라면 1호는 "삼양라면"


내 기억에 엄마 심부름으로 삼양라면을 사러 갈 때 45원을 들고 라면을 사러 다니다가

그게 50원으로 오르고 55원으로 오르고 5원 단위로 올라가던게 생각이 난다.

그때 사먹던 과자가 "마미" 과자였었는데 "마미"가 10원이었다.


내가 큰 딸이었으니까 엄마는 돈을 들고 가야 되는 심부름을 나를 시켰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부침개를 해주시거나 라면을 끓여주셨었다.


라면에 국수를 집어 넣고 양을 늘려서 끓여주던 엄마의 라면

그때 라면을 사러 다니던 작은 구멍가게를 우리는

"또세" 네 집이라고 불렀다.

가게 아저씨를 우리는 "또세 아저씨"라고 불렀던것같다.

작년인가 갑자기 "또세" 네 집 이름이 궁금해서 엄마한테다.


나 - "엄마 우리 어렸을 때 다니던 그 가게 있잖아 우리가 "또세네" 라고 부르던 그 가게"


엄마 - "또세네 집"

나 - "응 근데 그 집 이름이 왜 또세였어, 그 집 아들이 또세가 별명이었나"

엄마 - "아니 그 아저씨가 손님이 나가면 하도 뒤에다 대고 "또오세요 또오세요" 인사를 해서 그래서 "또세" 된거여


아 진짜 내가 우리 엄니때문에 가끔 우울한 기분이 확 날라간다


문구부터 라면 과자 아이스크림까지 없는게 없었던 나의 최초의 가게 "또세네 집"

이치란 라멘에서 시작해서 멀리도 갔다.


다시 교토


회전 초밥 집도 가고

악기사도 가서 필요한것 사고 (클라리넷에 꼭 필요한 것들이 한국에서는 만원이었는데 여기서는 500엔이었고 게다가 세금까지 면제되니까 완전 이익)


어제는 교토 역 지하에 있는 "동양정"




오리지널 함박 스테이크와 오므라이스를 시켜서 맛있게 먹었다.

오래된 경양식 집 분위기에 직원들의 옷차림도 그런 분위기

굉장히 정직한 함박스테이크다 라는게 저 음식에 대한 나의 평이다.


또 가고 싶다. 딸은 아주 대 만족한 맛이었다.



내가 블로그에 하도 소상을 팔아먹어서 우리 딸은 소상을 처음 보고 바로 소상인줄 알았다고 한다.

왜냐면 내가 그렸던 소상 그림하고 똑같이 생겼거든^^


학교 앞에서 만나기로 한 딸이 내가 안나오자 학교까지 들어와서 1층 로비에서 나를 기다렸는데

머리에 띠를 두른 뚱뚱한 남자가 내려오길래

"저게 소상 아닌가" 비로 알았다고 한다.


요즘 수업 시간에 "소상"과 "쇼상"이 너무 떠들어서 지난주에는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그 두사람을 한번씩 쳐다보는 지경이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떠들고 밉게 굴어서

내가 학교앞에서 소상을 담벼락에 몰아붙이고 한 마디 해줬다.


나 - "소" 너무 수업시간에 떠들더라 아주 시끄럽더라 개노무새끼 고만 떠들어 알았지"

소 - "네"


단호하게 한마디 해줬더니 소가 굉장히 움쭐하는 모습이 참 웃기기는 했지만

너는 좀 혼나야 된다. 이 자슥아


수업 시간에도 교과서에 없는 엉뚱한 얘기로 선생님의 진을 빼놓는지 천사같은 우리 요시코 선생님조차

"소상-.- 교과서와 관련있는 질문을 해주세요"


4월에 처음 학교에 왔을 때는 소랑 짝꿍을 못해서 안달이 났었는데 이제는 어휴 저 자슥 수업시간에 엉뚱한 소리 할 떄는

쥐어 패주고 싶으니 사람 마음이 참 그렇다.


일본어에 "다또에바 (예를 들면)" 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소"는 질문할 떄 꼭 이렇게 시작한다.


소 - "쎈쎼이 다또에바-----"


소가 "다또에바"를 하도 입에 달고 살아서 내가 내 짝꿍한테 "이제부터 소상은 소상이 아니라 다또에바 소라고 불러야겠어"그랬다.


그래서 "소"는 이제부터 "다또에바 소"


오늘은 수업 시간에 물부족 국가의 비참한 현실을 비디오로 보는 시간이 있었는데

소말리아의 물부족 사태를 일본 방송으로 봤었다.


황톳물과 부유물질이 둥둥 떠 있는 더러운 물을 길어다 식수로 먹는 소말리아 난민촌의 이야기였었다.

더러운 물을 식수로 먹으니 아이들이 모두 병에 걸려 있고 뭐 그런 가슴 아픈 이야기여서 보면서도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갑자기 "다또에바 소"가 오염 물질이 둥둥 떠 있는 황톳물을 보면서

"낄낄낄 미소시루"


아이들이 모두 "다또에바 소"를 한심하다는듯이 쳐다봤고 좀처럼 화내는 일이 없는 요시코 선생님 마저

야단을 칠 지경이었으니 "다또에바 소"가 어느 정도로 눈치없는 인간인지는 오늘 그 바닥을 보인 셈이다.


"제게 미소시루로 보이면 니가 처먹어라 이새끼야"


속으로만 욕을 날린다는 것은 참 답답하다.

"다또에바 소"의 얼굴에 대고 욕한번 꼭 해주고 비행기타고 귀국해야지 싶다.


소말리아의 평균 수명은 아직도 50세라고 방송에 나오길래 내가 내 한국 짝꿍 "양상"에게 조용히

"그럼 나는 벌써 죽었다" 그랬더니 얘가 막 웃었다.

그랬더니 그걸 들은 "요시코 "선생님도 막 웃으면서 "저두요" 그런다.


요시코 선생님은 한국에서 3년 정도 사셨기 때문에 우리 말을 어느정도는 알아들으시니까 선생님이 내 말을 듣고 웃으신거다.

( 급하면 한국말도 하시고 칠판에 쓰기까지 하셔서 )

오십에 평균 수명이 끝나는 나라가 아직도 있었다.


가난하고 전쟁이 많은 나라일수록 여자와 어린 아이들이 제일 힘든게 그 나라의 현실이다.

나는 참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

아침에 일찍 딸을 깨워서 교토역으로 보내면서 딸도 나도 이번에 헤어질 때는 울지 않았다.


아들은 일주일 째 예비군 훈련 받느라 고생

막내는 시합나가서 뛰느라 고생

둘쨰는 둘째대로 잠깐 삼박사일만 편하고 다시 돌아가면 렛슨하러 다니느라 고생하고

생각해보면 우리 집은 나를 비롯해서 모두가 제 몫은 하고 살고 있는 것같다.



비가 굵게 쏟아진 오늘

더위는 좀 사라졌다.



아침마다 바쁘게 건너다니는 산죠 다리를 내일은 느긋하게 걸어갈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금요일이다.



벌써 말일


말일의 공식


집세 - 머리 염색 - 빵집 월급

시간이 참 빨리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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