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일년 맡아 온 합창단 회계를 후임 회계에게 넘겨주는 월요일. 관리하던 두 개의 계좌를 그녀에게 보내고 잔액이 0원이 되었지만 잔액이 0원인게 이렇게 기쁠 일인지, 위청수 마시고 속이 뻥 뚫린것처럼 시원합니다.
아침 일찍 후임 회계에게 돈을 이체하고 가벼워진 계좌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 하지만 눈꺼풀은 살짝 무겁습니다요.
어젯밤, 사당까지 가서 남편 친구 부부와 일요일 밤 수다 파티를 열고 왔더니, 친정까지 다녀 온 주말 2박 3일의 휴유증.
눈꺼풀로 옵니다. 그래도 즐거웠던 밤 나들이에 회계까지 인계했으니 그걸로 오늘은 충분히 괜찮은 하루라고 생각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수입 지출 잔액 맞추고 행사 후 회계로서 챙겨야 할 일들이 쏠쏠하게 있어서 돈 버는 직장 일보다 바쁠 때가 있었는데 이젠 책임이 없어졌으니 섭섭할 일은 없고 시원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회계를 맡아 일 년을 해 보니 돈이나 숫자보는 눈이 좀 생겨서 뼈속까지 문과생인 나에게는 도움이 되는 부분이 많았으니 어떤 일이든 해 보면 그만큼의 이익이 있지 손해는 없다. 를 알게 되었네요.
고 2로 올라가면서 문, 이과로 나눌 때 문과는 6반 이과는 3반이었습니다.
나야 뭐 고민없이 문과를 써 냈지만 아이들은 이과 썼다가 한참 있다 다시 문과로 고쳐 쓴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영신이는 친한 친구였는데 이과로 가서 2년을 같은 반을 못 하다가 3학년 때는 우리 반 옆에 영신이 반이 있어서 복도에서 자주 수다를 떨었는데 그 때 영신이가 말 한 이과를 갔던 이유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우선 영신이는 엉뚱한 구석이 있던 아이였는데요. 우리가 메이커 병에 걸려서 어떻게든 남들이 알아주는 옷을 사 입지 못 해 안달나있던 1984년 고 1 때 같은 반일 때도 영신이는 움베르또 세베리같은 비싼 남방을 매일 학교에 입고 올 만큼 넉넉한 집 안 딸이었는데, 절대로 그걸 티내지 않았던 쿨한 아이였습니다.
오히려 옆에서 애들이 호들갑이었죠.
아이들 : "영신아, 니 옷 움베르또 세베리 맞지?"
영신 : "몰라, 집에 있어서 입고 나왔어"
다른 애들말이라면 그런 말 조차 거만하게 들렸겠지만 영신이는 진짜 그랬을겁니다. 얘가 워낙 그런 걸 싫어하니 영신이 엄마가 사다 놓고 얘는 그냥 입고 다녔을거다.
엄마 협박해서 겨우 뻬뻬로네 여름 티셔츠 두 벌 정도 사서 바지는 옹달샘 바지로 맞춰입고 메이커 돌려막기를 하던 그 시절에 영신이는 매일 다른 움베르또 세베리를 입고 다녔고 있는 티도 절대 내지 않았으니 나는 영신이의 그런 쿨한 면이 좋았었는데 이과로 가서 만날 일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멀어졌었다는 거 아닙니까..
살아보니 문, 이과가 뭐라고 그땐 그랬었나.
이 나이돼보니 문과였던 나도 이과처럼 살고 이과였던 아이들도 문과처럼 살 텐데 말이지...
다시 돌아가 1986년. 어느 날 복도 계단에 영신이랑 둘이 앉아 진지하게 진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 영신아, 너는 무슨 과 갈려고 이과갔어.
영신: (내 질문에 이미 정신나간 표정과 눈이 반 쯤 풀려서) 항공대학교. 갈거야.
나: 와 멋지다. 영신아. 너한테 그런 꿈이 있는 지 몰랐어.
영신: 내가 왜 항공대학교 가고 싶은 지 알려줄까. 에어울프때문이야.
영신이는 에어울프 이야기 하면서 주인공 남자가 너무 좋아서 자기도 그런 조종사가 되고 싶어서 이과를 선택했고 항공대학교를 간다고 했는데 영신아, 정말 내년 1월에 이탈리아가는 비행기에서 기장이 영신이면 좋겠다.
세상 살아보니, 문 이과 아놔 떡이다. 퉤퉤퉤!!! 수학1에서 끝난 나의 수포인생이지만 합창단 회계 일 1년동안 잘했다.
박수 짝짝짝. 0원된것도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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