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 3
자식키우는 일에 마침표가 어디 있을까만은 나는 마치
긴 소설의 끝을 향해 달리다가 이제는 탈고를 앞둔 작가의 심정이 되었다.
아니 이건 고상한 표현이고
내가 남편에게 한 직설적인 표현은 바로 이거다
교도소 만기 출소자같은 심정이라고
그러니 당신은 아이 시험 끝나는 날 두부 한모 들고 서있으라고 했다.
큰 애는 남자아이에 연습도 안하던 현악기 전공생이어서
무던히도 애를 태웠다.
고등학교때 징그럽게도 연습을 안해서 저게 대학이나 갈까 했는데
그래도 고등학교때 속 썩인거 반성문 쓰듯이 대학은 본인이 원하던 대학으로 한 번에 가줘서
그동안 힘들게 했던게 한 번에 싹 용서가 되는 기적을 행하셨다.
둘째는 나한테는 너무 과분한 딸이다 싶을 정도로 야무지기가 타의 모범이 되는 아이였었다.
한 살아래 동생과 같은 유치원을 다닐 때 벌써 여섯살때부터 자기 옷을 입고 나면
동생 옷을 입히고 자기 머리를 하나로 야무지게 묶고 동생 머리를 묶어주던 아이였었다.
오빠에 비하면 자기 일 정도는 걱정없이 하고 다니던 아이라서 대학교는 어디라도
들어가줄줄 알았었는데 그런 아이는 생각지도 않았던 재수의 길을 걷게 되고
자식일을 두고 "키큰 소리 말라던" 어른들 말씀을 이제야 알것 같다.
입시를 위해서 길고 긴 우면산 터널을 지나다닐 일도 이제 세번 밖에 남지 않았다.
수원에서 서울에 들어 오면서 지나게 되는 가장 긴 터널이 우면산 터널인데 길이가 만만치 않아
달리면서도 "아 길다" 는 느낌이 저절로 드는데
그 길의 끝에서 출구에서 들어오는 빛이 보이는 지점 쯤에 서 있는 것같다.
만기 출소자 같은 심정이라고는 하나
자식 키우는 일에 끝이 없듯이
대학만 들어가면 세상 근심걱정은 내것이 아닐 것 같았던 큰애가
벌써 내년이면 4학년이 되고
또 그 상황이 본인도 걱정 나도 걱정 그렇다.
벌써부터 졸업 연주를 걱정을 하면서 졸업연주를 하기 위해서 팔십만원 쯤 모아두어야
반주비도 주고 이것저것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며 돈을 모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게 또 끝이 아니고 졸업한다음에 뭐 하고 사나 그 걱정을 하는 걸 보니
고등학교때 대학 걱정하던거는 진짜 껌이었다는 생각이 들고
당장 1월이면 제주도로 한 달간 전지훈련을 가는 막내는 이로서 정말 집에서 나가는 것 같아
마음이 쌔해진다.
자식이란 기쁨 한보따리 안겨주고 걱정은 열보따리 쯤 안겨주는 웬수들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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