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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친구끼리 1박 2일

by 나경sam 2021.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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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 보다 은근히 파워 집순이과다.

가족이랑 나가서 놀고 자고 오는 것은 좋아해도 그 외에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지인들과 여행가서 잠을 잔다거나

그런 일이 없는 사람이 또 나다.

 

내 또래 아줌마들 보면 친구들이랑 여행도 자주 다니고 자고 오기도 하던데

그동안 친구들이랑 놀고 밖에서 잤던게 지난 주 금요일것까지 합해도 다섯번이 안된다.

 

처음은 승범이 다섯살, 은진이 두 살, 수민이 한 살이었을 때

대구 살때였다.

그게 산후 우울증이었을까!

친정 시댁 어느쪽에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대구라는 고립된 섬에서 셋을 키우면서 자고 일어나면

흰머리가 보이고 한 숨을 쉬지 않으면 숨이 막히는 것처럼 답답해서 한숨 쉬는게 버릇이 돼버렸다.

 

은진이는 활동성이 강했던 십 칠개월에,

승범이도 아직은 내 손이 많이 가던 다섯살이었지만, 떡애기 수민이가 아기 침대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종일 잠만 잤던 순한 아기였어도 나는 셋을 보면 좋다가도 눈물이 났다.

 

십칠개월이었던 둘째가 대구 관사에서 엄마없이 혼자 놀았던 응답하라 1999!!

 

승범이는 유치원에 갔고, 둘째는 집에 있는 걸 못참아서 십칠개월짜리가 혼자서 3층에서 내려가 1층에서 관사의

오빠들이랑 기죽지 않고 놀다가 어느집에 가서 점심도 먹고 돌아오고 싶을 때는 바람과 함께 사라져

집으로 돌아오는 자유로운 먹고 대학생이었다.

 

관사 마당에서 놀다가 자기 장난감이 아니어도 맘에 들면 집어들고 3층까지 올라오던 막가파 십칠개월이었다.

놀다 들어오면 집에서 아기 침대에 누워 있던 수민이를 찔러보고 만져보고 바닥에 내려놓으면 눌러보고

그러다가 수민이가 울면 은진이가 울었고, 그럼 나도 울었다.

유치원 갔다 온 승범이는 옆에서 쳐다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울었고 그럼 우리 넷이 배구 언니들처럼 서로 껴안고 울었던

대구 읍내동 눈물바다 드라마를 찍었다.

 

지금은 다시 태어나도 결혼하고 싶은 남편이지만 그때는 남편 놈일때라-.-

그때는 그도 살기에 바빴고 적응하느라 힘들었을 삼십대였다.

그동안 전주에서 대전에서만 근무하다가 경상도는 처음이라

나름 적응의 시간을 거치느라 직원들과 술도 많이 마시고 낯선 동네에서 자기 위치를 잡기 위해 애 쓸 때였다.

 

어디다대고 말 할 곳이 없었다.

자기 새끼 키우는 걸 힘들다고 말하는것이 먹히질 않던 시기였다.

산후 우울증이나 육아 스트레스라는 단어조차 뉴스에서도 안나올 때였으니

나는 내가 가슴팍이 깨지게 아픈것이

자고 일어났더니 허리가 팍 꼬부라져서 기역자 할머니 허리가 돼버린 것이

사람은 누구나 다 이러고 사나보다 하고 넘어 갔었다.

 

하루는 일요일에 남편이 직장에 나갔을 때였다.

자기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안나갔어도 됐는데 다른 사람 편리 봐주려 나가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남편 쉬는 일요일만 보고 살았던 내가 화를 냈고 부부싸움을 했던 것 같다.

 

토요일도 출근할 때였으니 나에게는 일요일이 해방구였었는데

번번히 다른 사람 일 도와준다고 나가던 남편이 좋았을리가 없었다.

터질게 터져서 부부싸움을 하고 그래도 출근한 남편이 미워서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었다.

 

일요일인데 애들 좀 봐주지 출근했다고 하소연을 했더니

얄짤없이 야박한 말씀을 하셨다.

'밖에서 일하는 사람이 힘들지 집에서 애보는 사람이 힘드냐고'

 

그때부터는 시어머니께는 애들 보는거 힘들다는 말도 한 번도 한 적도 없고

감정을 나누 이야기는 입을 닫아버렸다.

 

이십년 전일이지만 들쑤시면 아직도 서운한게 올라오는 야박한 말씀이셨다.

생각날 때마다 남편에게 말을 하면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

남편놈에서 '놈'을 한참 전에 뗀 사람의 옳바른 태도라 할 수 있겠다.

 

하여간 그 때, 대구에서 너무 힘들 때 살려고 친구들이랑 여행을 갔다.

대학 동기들 두 명이 대구로 와서 내가 태우고 함께 경주에 갔었다.

수민이를 여름에 낳았고 가을에 경주에 갔었다.

쌀쌀했고, 저녁에 보문단지에서 먹었던 갈비 우거지탕인지가 맛있었다.

감포 바닷가 대왕릉이 보이는 모래밭에 앉아서 시댁 흉을 입이 찢어져라 보고

어딘지 기억이 안나는 동네에서 선희는 시어머니 드린다고 황남빵을 샀었다.

 

하루였지만 맘이 풀어지는게 있었다.

혼자서 싹 풀린 마음으로 경주에서 대구로 돌아와, 그냥 돌아오기가 어쩐지 나도 서운해서

동아백화점에 들러서 애들 준다고 뭔가 선물을 사서 돌아왔더니

남편이 나를 보자마자, 당신 오면 기분 좋으라고 청소를 싹해놨더니 은진이가 분유통을 엎질렀다며

십 칠개월 된 은진이의 만행을 일러바치는 걸로 집에 돌아옴을 알려 줬었다.

은진이는 기저귀 찬 엉덩이를 한 대 맞았던것같다.

 

남편이 나 없이 셋을 데리고 잤던 최초의 날이었고

나는 애 셋을 두고 나가서 잤던 최초의 날이었다.

은진이는 분유통을 날려서 엉덩이 스매싱을 당한 최초의 날이었지만

나의 울분은 뭔가 반은 날려버린것같은 여행이었다.

 

그래서 여행이 좋은거다.

 

이후로 몇 년 텀을 두고 대학동기들이랑 쌍계사로 일박이일

또 십 년 쯤 전에 천안 상록 리조트로 일박 이일

몇 되지도 않는 동기들끼리 지금까지 살면서 대학때 함께 엠티갔던 횟수보다 훨씬 적게 여행을 갔다.

 

지난 주 금요일 수원 여여재에서 넷이서 일박을 하고 밤에 화성을 걷고

이른 아침에 아이유 가을아침을 들으며 화성을 걸었다.

 

마음에 드는 남자옆에 섰으나 그놈이 그놈이었다.

함께 누워 팩을 하고 근력 테스트를 하고 누가누가 더 유연한지 몸을 접어보고

맥주 네 캔을 따고, 수원에 왔으니 비싼 갈비 한 번 먹어야겠어서 일인분에 5.5 생갈비를 뜯고

함께 엠티를 가서 잤어도 누구 한 사람 코고는 아이도 없었는데

이제는 드르렁 도로롱 쌕쌕 코 고는 아이도 있고

함께 일문과를 졸업했으나, 명품가방 부럽지 않은 가방을 만드는 공방 선생도 있고 신뢰가 얼굴에 써 있는

부동산 공인중개사 큰 손도 있고 우리들의 자랑 6급 국가 공무원도 있었으니 ( 다음에 만날 때는 사무관 승진 꼭 해서 꽃가마를 태워야겠다) 1987년에 만나 2021년 시간은 언제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아침에 콩나물 국밥 한그릇씩 먹고 수원의 아침 빵집에 가서 몇 년어치 수다를 대방출시키고

분기에 한 번씩은 보자며 바람같은 약속을 했으나

지켜질지 안지켜질지는 모를 일이고

다들 또 볼 때까지 행복하게 지내자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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