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가 하마터면 곱게 늙을 뻔 했으나, 남편놈 눈에 들켜서 우리 입으로 들어왔다.
남편놈이라 함은 순전히 전지적 오이 시점에서 말 한 거고, 내 감정은 아니다.
내가 오이였으면 그렇게 말했을것이다.
화분뒤로 늘어져서 몸을 숨기고 길쭉했던 다른 오이들과 달리 배 나온 스모선수들처럼
몸집을 불려가며 색깔도 늙은 오이들처럼 변해갈려고 하는 참이었다.
남편이 따 온 오이를 보고 내가 그랬다.
"곱게 늙기도 어렵네"
화분 뒷 쪽으로 늘어져 있어서 낮은 포복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꼼꼼한 남편 눈이 아니었더라면
그냥 그렇게 늙어갔을지도 모른다.
가지에 달린 것만 오인줄 아는 내 눈에는 절대로 들킬 일이 없는 위치였으나, 옥상에 가면 텃밭 주변을 샅샅이
금광처럼 살피는 남편 눈은 피할 수 없었을테니
"오이야, 너도 팔자려니 해라"
집이 작기도 하지만, 오이를 채썰었더니 냄새가 안방까지 난다며 남편이 오이 냄새를 맡았다.
두 개 남아 있던 모닝빵위에 채 썬 오이를 올리고, 양파도 올리고, 피클도 올리고 떡갈비를 구워서 채소만 있는 빵 사이에 끼워주고 (환상의소스는 - 머스터드, 마요네즈, 케첩) 이지만 케첩도 없고, 머스터드도 떨어 진 냉장고-.-
빵에는 딸기 잼 바르고 떡갈비 위에는 마요네즈만 뿌려서 아사삭, 한 입 아니 나는 네 입 정도로 끝났고
입이 큰 남편은 두 입 정도로 끝난 우리의 아침
그래도 너무 맛있어서 둘 다 기분좋은 아침
모닝빵 사이에 넣고 남은 오이는 승범이랑 나랑 남편의 열무 물김치 말이 국수
열무물김치 국물에 생수와 매실 엑기스 조금 넣고 간을 맞춘 다음 국수 삶고, 김치 올리고 얼음도 넣고
오이 채 썬거 올리고 깨 안뿌리면 완전 섭섭하지
방울 토마토도 있으니까 넣고
계란 없으면 어때
연주회 연습때문에 주말에 집에 오기를 포기한 딸을 제체두고, 태백으로 여름 전지 훈련을 떠난 셋째를 잠시 잊고
우리 식구는 남편과 나 승범이만 있는 것 처럼 맛있게 먹은 점심
점심 먹고 남편과 여주 아울렛 - 돈쭐을 내주고 싶었으나 돈쭐 내러 온 사람들 구경하는 걸로 대리만족
여주 프리미엄아울렛 명품관 앞에서 줄이 늘어 선 곳은 몇 군데 안되었다.
알아주는 명품관 앞에는 역시 돈쭐 내러 온 사람들이 있고 나머지는 그냥 설렁설렁한 수준
남편과 나는 딱 두개만 사서 왔다.
"르 쿠르제 커피잔 셋트+ 스위트 레드 와인 두 병"
모처럼 동그랗게 주황색으로 지는 석양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오니 또 저녁이 되었네
삼시세끼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과 시켜서 찾아 온 치킨과 여주에서 사 온 와인으로 저녁 끝
애들 없이 둘이 치킨을 시켜서 먹은 게 오백년 전 일처럼 까마득하지만
애들없이 우리 둘이만 먹었어도 허니콤보는 옳고, 와인은 달달했으며,포도와 복숭아는 단물이 툭
광복절 전 날 삼시세끼가 평화롭게 지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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