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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나 왕년에 연필 좀 부러뜨린 사람이야"

by 나경sam 2020.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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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는 원격학습도우미로 오후에는 기초 학력 도움 강사로 사개월 동안 여덟시간 일을 하게 되었다.

생협에서 메주와 항아리 공포에 시달릴 때를 생각하면 학교에서 꼬맹이들 돌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것 같지만

그래도 나름 고충이 있는 동네가 바로 초등학교다.

 

열명도 안되는 돌봄교실 아이들의 원격학습을 봐주는데 코로나19가 정말 아이들의 학습권을 망쳐버렸다.

연필 쥐는 힘도 없고 노트에 글씨를 쓸 일이 없는 아이들이니 제대로 연필을 잡는 아이들이 한 명이나 있을까 했다.

1교시당 30분씩 진행되는 원격학습에 아이들이 화면에 집중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힘들어서

엎드려서 시청을 하거나, 이미 다 풀어 놔서 할 게 없거나, 원격학습꾸러미의 색칠만 하거나

화면으로 진행되는 수업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게 이해가 되면서도

열명도 안되는 애들을 봐주는데 잠시도 앉을 틈이 없었다.

 

결석해서 진도가 안맞는 애들도 따로 봐줘야 되고, 오답도 체크해주고 집중 못 할까봐 원격학습 강사처럼

소리내서 읽어주고, 내가 생각해도 기특한 원격학습도우미로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원격학습 끝나는 11시가 되면

 

나 집에 다시 돌아갈래! 의 기분이 되는데-.- 남은 네 시간을 또 보내야 돌아 갈 수가 있다-.-

 

나 다시 돌아갈래

학교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마스크를 쓰고 지내야 되는 일학년을 보고 있으면 안됐다 싶다가도

이거는 이렇게 해야 된다 저거는 이렇게 하자 가르치면 툴툴 거리면서 "안다고요" "알았다고요" 삐딱하게 나오는

쪼만한 것들을 보면 오십 세짤 내 피가 끓어 확 씨 이것들을 쥐어패고 집으로 갈까보다 오만잡생각이 다 난다.

 

반항할꺼야, 격하게 반항할거야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그래 이까이껏 다 안다구

 

딱 이렇게 생긴 캐릭터가 있다. 심지어 헤어 스똬일도 비슷하네

몇번 서로 탐색전을 하다가 어제는 저녀석이 나한테 조용히 왔다.

 

왜? 그랬더니 아주 낮은 목소리로

제가 원래는 연필도 막 부러뜨리고 그러는데 선생님한테는 참는거예요

그러는거다. 저런 표정으로 말하니 안 웃길 수가 없었다.

내가 좀 웃겨서 왜 나한테는 참아? 그랬더니

무서우니까요.그래서 참는거에요 다른 사람한테는  저도 안참아요

응 그랬구나, 고마워 다른 사람한테는 연필도 일부러 부러뜨리고 그러는데 선생님한테는 안그러는거구나

고마워, 너 지금 잘하고 있으니까 앞으로는 더 잘할수 있을거야 그랬더니

얘가 오늘부터는 인사도 잘하고 뭐든지 나한테 확인 받을려고 하고 하여간 왕년에 연필 좀 부러뜨렸다는 비행소년이

순둥이가 되었다.

나는 그 애가 연필을 부러뜨렸다는 얘기를 할 때 표정이 비장해서 웃겨 죽는 줄 알았다.

 

일학년이 과거에 놀았다는 걸 알려면 연필을 얼만큼 부러뜨렸느냐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아이다.

오십세짤과 여덟짤의 신경전

 

내가 이긴것 같아. 야호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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