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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입으로는 밥을 먹고 눈으로는 불빛을 쏘는 아이템 획득"

by 나경sam 2020.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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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격 학습 두 시간 봐주고 나서 급식실로 갈 때, 나는 오전의 에너지는 이미 다 써서 충전이 필요하지만

아이들은 어디서 새로운 에너지를 받는지, 기운이 넘친다.

방전되지 않는 배터리를 보는 것 같다.

 

무섭다.

 

손 끝까지 기운이 넘쳐서 자기 흥에 겨워 급식실가는 짧은 이동 시간에도 손을 탈탈탈 털면서 가는 아이도 있고

가만히 걷지를 못하고 옆으로 게처럼 걷는 아이도 있다.

학교에 아이들이라고는 내가 데리고 급식실로 가는 아이들이 전부다.

교장선생님부터 학교의 모든 사람들이 급식실에서 우리를 알게 모르게 쳐다 보고  있다는 걸 안다.

뒷통수에도 눈이 안달려 있으면 학교에서 일을 못한다.

그리하여 눈으로는 앞줄부터 세줄 까지 식탁을 차지하고 밥을 먹고 있는 돌봄 교실

두 반의 아이들을 눈으로 통제하면서 입으로는 밥을 먹는다.

 

누가 나한테 선생님 밥이 눈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어요, 그랬지만

밥은 입으로 들어가고 심지어 맛있기까지 하다.

아이들만 맛있는거 있으면 두 번 타러 가고, 선생님들은 한 번 먹고 말던데, 나만 유일하게 두번이다.

하하하

 

애들은 밥먹는 속도가 빨라서 밥 먹고 나면 책상을 두드리거나, 아직 먹고 있는 옆 친구에게 장난을 걸거나

뒤로 홱 돌아서 난데없이 묵찌빠를 하자고 하거나, 몸을 그냥 두지를 못한다.

이해한다. 나도 그랬었으니까, 가만히 있기가 얼마나 어렵고 참기 힘든 일인지 모르진 않지만

다 함께 교실로 돌아가기로 한 이상, 먼저 먹은 아이들을 돌려 보낼 수도 없고, 나는 대략난감이다.

 

그래도 내가 얼마나 얘들을 꽉 잡아놨는지, 처음에는 손도 못댈것 같았던 애들이 알아서 말을 듣기 시작했다.

자기들도 알게 된 것 같았다.

급식실에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어떤 행동 하나를 하게 되면 시선이 쏠린다는 걸 스스로 알게 된 것 같았다.

 

한 번은 너무나 힘들었던 아이한테, 내가 거짓말을 했다.

"OO아, 네가 급식실에서 밥도 잘 먹고 선생님 말을 아주 잘 듣는 예쁜 아이같다고 교장 선생님이 칭찬해주셨어"

하지도 않았던  교장 선생님 칭찬까지 끌어다가 에너지가 넘쳐 있는 이 아이를 좀 가라앉혀서

점심 시간을 무사히 넘겨보자고 나 혼자서 짠 거짓말이었다.

 

하루도 편한 적이 없었던 아이였기 때문에 그냥 그 말을 했지만 아무런 기대도 없이 급식실로 갔으나.

칭찬은 고래도 춤 추게 하는 건 내가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칭찬은 OO이를 급급급 얌전한 아이로 만들어버렸다.

 

급식실로 이동할때부터 총만 안 찬, 진짜 사나이 모드로 돌변해서 각잡힌 걸음으로 걷더니 급식실에서 밥을 타서 자리에 앉자마자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 누구세요?"라며 주변을 휙 둘어보더니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식사하고 계시던 교장 선생님이 "왜?" 그러셨을 때 나는 OO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서

밥맛이 뚝 떨어져버렸다.

하지만 우리의  OO OO는 한 번 씩 웃고는 "그냥요" 하고 밥을 먹기 시작

 

그 날  OO이는 최고의 학생이 되어 밥도 잘 먹고, 인사도 잘하고, 얘가 그전까지 내가 알던 그애가 맞나 유전자검사

해봐야겠다 싶을 정도로 돌변해서, 나를 깜짝 놀래켰다.

 

하여간 단순한 애들이다.

내일은 다시 원래의 OO 이로 돌아갈 망정 그날은 눈으로 레이저를 쏘지 않고 밥을 먹었으니

평화는 먼 곳에 있지 않고 그렇게 가까이에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주는 웃음도 가까이에 있다.

세로 덧셈식을 하는 데 이렇게 답을 쓰는 건 당연하고,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우리의 1학년중 한 명은 이렇게 답을 썼다.

처음에는 왜 이런 숫자를 썼는지 짐작도 못해서 오히려 내가 물어봤더니, 그것도 몰라요 세개 다 더했잖아요

얘가 오히려 나를 바보취급했다.

아하 세 개 다 더했구나

 

 

숫자 세개를 다 더해서 답을 썼다. 기발하지 않은가

 

이래서 일학년이구나 나혼자 돌아서서 웃고 얼굴 보고 웃고

눈에서 레이저도 쏘지만, 얘들땜에 웃을 때도 많아

 

그래서 지금 이 시간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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