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더울 때 있는 시어머니 생신
그래도 지금은 시원한 식당에서 만나 거기서 밥 먹고 2차는 카페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고
3차만 시댁으로 가서 마무리 술 한잔 마시고 돌아오니 십 년 전 쯤과 비교하면
며느리 만만세 시댁 입구에 현수막이라도 걸어야 될 판이지만
그래도 시댁 가기 전 날이면 심호흡 한 번에 마음을 다 잡는다.
결혼 생활 이십 육년 차에 오십이 넘은 며느리가 이런 마음이라는 게 참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시어머니는 엄마가 될 수 없고 동서들은 내 여동생이 될 수 없다.
시댁 담장만 봐도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드는 게 아니라 이제 정말 도착했구나 싶은 마음부터 드는 건 스물 일곱
결혼했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결론은 시댁 식구는 가족이 될 수 없다.
아니 가족이어서는 안된다.
적당히 거리감이 있는 예의가 필요한 사회적 관계이어야 한다.
나한테는 그랬다.
상견례 할 때 우리 시어머니가 우리 엄마한테 당신은 딸이 하나 밖에 없어서 큰며느리인 나를 딸처럼
생각하겠노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우리 어머니가 나를 딸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분명히 말 할 수 있다.
물론 나도 우리 어머니 딸이 되고 싶은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으니 쌤쌤이긴하다.
딸처럼 생각했다면 내가 결혼하고 첫 미역국 끓일 때 미역 안 씻어서 끓였다고
너는 친정에서 미역국 끓이는 것도 한 번 안봤나고 정말로 한심한 아이보듯 그러지 않으셨을것이다.
산모용 기장 미역으로 국을 끓였는데 그걸 불리지도 않고 그대로 국으로 끓였다고 했더니
불리는것은 고사하고 어머니 식의 표현에 의하면 주물주물 빠락빠락 빨아서 국을 끓여야지 그냥 끓였다고
핀잔을 주셨다.
손부터가 음식 솜씨 좋게 생긴 우리 시어머니가 봤을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결혼 초 시누랑 한 동네에 살았는데 시누네 집 가면 그 집의 스텐 냄비들은 반짝반짝 윤이 나는데 네 살림살이는
왜 이러냐면서 타박도 하셨다.
딸이었다면 언니랑 비교 당한 꼴인데 시누는 친 딸 나는 입양한 딸이었던 거다.
결혼하고 김장을 처음 해봤다.
딸들이 많았어도 우리 엄마는 마늘 한 번 까라고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김장할 때 배추를 절이고
씻는다는 것도 몰랐던 바보천치였다.
결혼하고 시댁에서 김장을 처음 해봤다.
새벽에 배추를 씻어야 된다고 겨울에 시아버지랑 나랑 시어머니 셋이서 절여진 배추를 씻는데
남편은 승범이랑 방에서 자고 있었다.
아들은 자라고 두고 며느리인 나는 덜덜 떨면서 배추를 씻었다.
내가 딸이 아니고 며느리였던 결정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절여진 배추만큼 씁쓸했던 첫 김장의 추억이다.
몸도 얼고 마음도 얼어 배추를 씻고 아침에 동네 아줌마들이 와서 김장을 담가주는데 서울 살 던 둘째 동서가
돈 5만원을 고춧값이라고 보냈다고 어머니가 동네 아줌마들 앞에서 자랑을 하실 때
우리 엄마가 김장 할 때는 마을 한 쪽 안까봤다가 쪽파 다듬으라고 어머니가 한보따리 내놨을 때부터
밀려들었던 서러움이 나 혼자 폭발했다.
남편도 나도 뭘 몰라 다투고 맞춰가던 결혼 후 첫 2년 정도가 가장 힘들었다.
싸움의 윈인이 어머니가 많았던 때였다.
어머니를 포함한 시댁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자라면서 한 번도 아버지 말에 싫다고 한 적이 없었다고 했던 남편이었고 결혼 전 까지 본인 급여 통장까지
어머니가 관리를 했으니 말이 필요없는 아들이었을것이다.
어머니도 젊었고 나도 어렸고 남편도 어쩔줄 몰랐던 셋 다 아무것도 몰랐던 옛날 이야기다.
헤아려보니 오십 여섯에 나를 며느리로 보셨다.
지금 내 나이에서 세 살만 더하면 나도 그당시 우리 어머니 나이가 된다.
아들은 어디 내놔도 자랑스럽고 잘난 세상에 둘도 없는 착한 아들인데 며느리라는 애는
싫은 건 얼굴에 표시를 확확 내는 아이이니 좋았을리가 없다.
내가 차곡차곡 어머니 싫어할 이유를 만들어 가며 감정을 세이브하는 동안 나만 어머니를 싫어한게 아니라
어쩌면 어머니도 내가 좋았을리는 없었겠다 싶다.
내 바로 밑 동서야 서울 살았기 때문에 어차피 둘이 부디칠 일도 거의 없었고 어머니 입장에서는 시어머니 노릇을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둘째 시동생이 완벽하게 수비를 하고 있던 그 집은 내가 봤을 때는 어머니가 끼어 들 틈이 없었고
막내 며느리야 결혼하면서부터 모시고 함께 살았으니 그 둘 사이에는 어쨌든 미운 정 고운 정 이라는게
형성 된 게 있다.
어머니가 시어머니 노릇을 마음껏 하고 싶었던 대상은 바로 나였다.
나는 큰며느리였고 결혼 초에는 시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기 때문에 어머니의 영향권 안에 있던 며느리였으므로-.-
그리고 남편은 헛밧질도 안되는 구멍뚫린 최악의 수비수였으니
그래서 내가 힘들었다. 남편 보고 있나
어머니도 나도 그런 저런 세월 다 보내고 둘 다 늙었다.
어머니 때문에 남편이랑 싸운 적도 많았다.
둘의 싸움에 어머니가 원인이 된 적이 많아서 그래서 내가 어머니를 더 싫어했었는데
남편이 점점 객관적인 입장으로 어머니를 보기 시작하고 나를 이해해 주면서
내가 좀 편해질수 있었다.
남편의 탯줄은 그 때 비로소 끊어진게 아닌가 싶다.
그나마 오래 걸리지 않고 결혼하고 한 이년 정도 우리끼리 각종 싸움을 해가며 남편이 확확 달라져 내 편이 되어주고
입장을 진심으로 이해하면서 편해졌다.
시골에 사셨지만 옷입는거나 화장하시는 거나 도시에 사는 우리 엄마보다 한 수 위였던 우리 시어머니는
오랜 취미로 에어로빅을 하셨다.
에어로빅 회장도 하셔서 김장을 하면 춤 선생님 것도 김치 한 통을 따로 챙기시곤 하셨는데
어머니의 스팽글 달린 댄스복만 쇼핑백에 하나 가득 남고 어머니는 이제 더이상 에어로빅을 못하신다.
어머니가 화려한 댄스복을 다 빨아 놨다면서 며느리들이 갖다 입었으면 좋겠다고 골라서 입으라고 그걸 주셨다.
"대략난감"
딸인 큰형님은 어머니가 그런 말 하는 게 너무 싫은지 짜증을 내면서 시어머니를 말렸고
그건 진심이었다.우리 엄마가 그랬다면 나는 형님이 그랬던것보다 아마 더 화를 냈을 지 모른다.
"엄마 미쳤어"라고 말이다.
"왜 그래 엄마 이런 걸 누가 입어, 에어로빅 하는 데 갖다주면 되지 왜 며느리들 귀찮게 하느냐고"
형님이 모처럼 사이다발언을 했지만 어머니가 완강하셨다.
"내가 죽은 사람도 아니고 왜 내 옷을 못 갖다 입어" 버럭하는 소리를 듣고 그냥 방으로 가지고 가서
그중에 가장 화려한 댄스복으로 내가 갈아 입었다.
아파서 에어로빅도 못하시고 살 때 줬던 돈 생각은 나서 버리지도 못하고 남도 못주는 어머니 마음이
내가 죽은 사람도 아니고 왜 내 옷을 못 갖다 입어에 다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저렇게까지 말을 하는 데 한 번 입어주는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냥 입고 말자 싶어서
돈많은 둘째 시동생이 며느리들이 갈아 입고 나와서 가장 어울리는 사람한테 상금을 줘야 겠다고
분위기 쇄신 차 말을 했지만 어린 애도 아니고 나를 움직인건 어머니의 그 말이었다.
"내가 죽은 사람도 아니고"
기왕이면 가장 화려한 걸로 입자
분홍 시스루 스팽글에 검정 입고 짠하고 나타나서 어머니를 만족시켜드리고 물론 상금도 탔다.
내가 입는 바람에 두 동서들도 입어봤지만 내가 가장 빨랐다.
내가 입고 어머니가 좋아하면 그걸로 된거지
단순하게 생각하자 싶으니 못할것도 없을 것 같고 덕분에 가족들끼리 한 번 웃고 마무리 짓고 올라왔다.
돌아오는 차에서 남편이 예전에 당신 힘들었을것같다고 툭 말을 꺼냈다
그말이 참 고마웠다.
어머니가 우리 엄마같지는 않아도 나도 확실히 예전보다는 어머니가 더 안스럽고 마음에 걸리는 건 사실이다.
가족이 되어 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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