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에게 제주도는 "소길리"
제주도에 살았던게 아니고 "소길리"에 살았다는 표현이 맞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싸우는 소리 자전거 타던 소리 수민이 울음소리가 남아 있는 관사
전주에서 이사들어 오기 전 "라동"에 배정받았는데 월드컵 조로 비유하자면 "죽음의 조"에 해당되는 "동"이라는
남편의 말이 있었고 그것은 바로 "술"을 말하는 것이었으니
"라동"사는 직원들은 자체 회식이 따로 있어서 한달에 한 번 꼴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저녁을 냈었다.
라동 101호 우리집도 저녁을 냈고 다음 달은 정민이네 또 그 다음달은 인애네 뭐 그런 식으로 돌아가면서 고기도 구워먹고 술도 몽창 마시고 그러느라 "죽음의 조"였던 것
다른 동 아저씨들은 알아서 밖에서 마시고 들어왔고 자체 동 회식은 없었지만 우리 동 아저씨들은 "라동"회식 따로
밖에서 알아서들 마시고 다니는 것은 옵션
그래도 우리집 양반은 제주도에서는 그나마 덜 마셨던 것 같다. 내가 학교 다니느라 오전에는 학교갔다가
저녁이면 남편에게 아이들 맡겨놓고 다시 학교 연습실에 갔기 때문에 다른 집 아저씨들처럼 노형에서 술마시고 새벽에
택시로 관사까지 올라오는 레벨까지는 오르지 못했으니 이 양반의 술마시기 레벨업은 대구에서 최고였던 걸로 결론
이사 올 때 다섯살이었던 은진이가 "라동"바로 앞 동그란 로터리같은 원 모양의 작은 둘레를 두발 자전거로
그것도 다섯살짜리용 자전거가 아닌 오빠가 타던 큰 자전거로 씽씽 돌 때 사람들은 놀랐었고
우리는 대수롭지 않았었다.
롤러 브레이드도 네살 때 탔고 자전거도 이미 네살 때 전주에서
아빠가 잡아주던 어린이용 두발 자전거로 떼고 왔기 때문에 다섯살에 오빠가 타던 두발 자전거 타기는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관사의 다른 사람들에게 은진이는 "운동천재"쯤으로 보였을거다.
전학 온 게 힘들었던 승범이는 생애 첫 전학이 힘들어서 전주로 다시 이사가자고 했지만 그래도 곧 적응하고
집에만 오면 가방 던져놓고 나가 놀았었다.
소길리 살 때는 노는 것 말고는 특별히 할 게 없어서 삼십 분 차로 데려다 줘야 되는 바이올린 선생님 집에
가서 바이올린 렛슨 받고 오는 게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사교육이라 그것말고는 승범이 인생에서도
소길리는 봄날이었을거다.
하지만 처음 전학온게 힘들어서 다시 전주로 이사가자고 나한테 조르기도 많이 해서 안스럽기도 했었다.
네 살밖에 안되었던 수민이도 늘 어느 집에서든 놀고 있다가 그 집에서 밥도 먹고 간식도 먹고 집에 돌아와
밖에서 배워 온 제주도 사투리를 우리 애들 중에서 가장 먼저 썼던 동네
우리 윗 집 살던 승범이 동갑 친구 친구 훈걸이가 "라동"앞 동그란 잔디 동산위에 올라가서
"일기에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오늘은 기압골의 영향으로" 까지만 해도 은진이랑 나랑 승범이 수민이는
웃느라고 바빴었다.
네 살 수민이가 일주일에 세 번 쯤은 오줌을 싸서 이불을 빨아 널기에도 지쳐서 아침이면 그냥 갖다 널었던
우리 전용 빨래줄
아침이면 이불 널고 학교 가느라 바빴었다.
속모르던 옆 동 수빈이 엄마는 내가 부지런해서 아침마다 이불을 일광욕시키는 줄 알았다고 했다.
밤에 오줌을 못가렸었도 엉덩이 한 번 안 때린게 남편과 나의 자랑이라면 자랑이다.
우리 엄마는 때려서라도 가리게 해야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했지만 이불 널기 좋았던 빨래 건조대 덕분에
저녁에 오줌을 싸놔도 해발 400고지 하루 볕이면 이불은 바짝 말랐다.
수민이가 네 살때 우리가 얼마나 좋은 부모였었는지 빨래줄은 알고 있다.
여름이면 저 빨래줄 아래로 제주도 풀들이 미친듯이 자라서 관사에 사는 남자 직원들이 예초기로 풀을 깎고
풀깎고 나면 풀 깍느라 일 한 시간보다 술을 더 마셨다.
2018년 겨울에 와서 보고 지금 다시 봐도 좋은 소길리 우리집 "라동"
"라동"에서부터 아랫동네 장전리까지 걸오 내려 오는 5.4킬로 산길 구간이 혼자라도 무섭지 않았던 것은
한 번 살았던 동네라서다.
아랫동네에서부터 차를 몰고 올라오다보면 도로 한가운데서 꿩들이 차에 부디칠듯 아슬아슬하게 피하던
소길리 산속길이 풍경이 너무 변했다.
이효리가 와서 살게 될 줄 2002년에 알았더라면 소길리에 땅이라도 한 쪽 사놓고 이사 나갔을 것을
이제와 보니 소길리가 예전 소길리가 아니다.
밖거리 안거리 두채가 한집으로 이루어진 제주도 촌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감귤나무 아래로 귤들이 떨어져 있던
소길리 촌 마을에 돈까스 집이라니
소길리에 인생 한 조각이 있었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돈까스집이 있다 못 해 웨이팅까지 해서 먹고 나왔다.
돈까스 집 "서황" 효리네 민박 찍을 때 윤아랑 이효리가 와서 먹은 곳이라는데
생선까스 맛이 바삭거림부터 식감 맛 모두 좋아 낮 맥주를 마시지 않음 안될 맛이었으나
여기서 잠깐 방심하면 안되는게 수술 끝 환자라는 걸 잊지 말것이니-.-
치질 수술에 낮맥주를 못마시는게 아쉽다면 아쉬운 점심
하지만 맛은 하나도 아쉽지 않은 나의 생선까스
가을이면 열렸던 소길리 체육대회
경품 추첨으로 우리 가족은 고기 불판을 경품으로 뽑아서 꽝으로 돌아 간 관사의 다른 가족에 비해서 소득이 좋았으나
옆동의 어느 집에선가 자전거에 당첨이 되어서 우리집 불판은 경품도 아닌게 되어 버렸던 소길리 체육대회
아직도 여전히 충분히 예쁜 장전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통학버스를 기다리면서 열심히 공을 차던 아홉살 열살의 유승범이 있던 곳
가을 운동회 날 어떤 할아버지가 술에 취하셔서 엉뚱한곳으로 큰공굴리기를 하고 달리셔서 우리 모두가 웃었던 운동장
장전초등학교 앞 "바오밥카페"
내가 들어갔을 때 젊은 남자 주인이 먼저 졸다가 핸드폰을 떨어뜨리면서 "어서 오세요"했고
나 혼자 있던 카페에서 장필순의 "키작은 하늘"을 듣고 나도 졸았다.
오 마이 서귀포는 꺼져 버려
오 마이 소길리
나에게 제주도는 소길리다.
"오 마이 소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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