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염색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얘기다.
서른 살 갓 넘어서부터 흰머리가 쑥쑥 나기 시작했다.
애를 셋 그것도 둘째와 셋째는 간격이 민망할만큼 짧게 낳아서 앞뒤로 업고 안고 키웠어도 셋을
자연분만한 엄마치고는 관절 튼튼 팔팔한 관절이라서 살면서 어디 한군데 골절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으니
나야말로 출산에 특화 아니 최적화된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었나보다.
하지만 머리카락은 취약했으니
승범이 낳고 쑥
은진이 낳고 쑥
수민이 낳고는 머리가 빠지다 못해 흰머리가 쑥쑥 나기 시작했다.
서른 한 살에 흰머리가 소복했다.
그래도 그게 이상하다는 자각도 못했을만큼 육아에 치였었다.
둘이나 셋이나 그게 그거 같았어도 막상 셋을 낳고보니 세상에 아이 키우는 일이 가장 어려웠어요 라고 하고 싶을만큼
힘들었다.
머리빠져 흰머리 나 허리 아퍼 잠도 제대로 못 자 누구 말대로 똥도 내 맘대로 못 싸는 지경이었으니
우울증에 걸리지 않고 그 시절을 나름 즐겁게 보냈다는 건 만으로도 내가 참 대단한 사람이다.
마음을 내주지 않고 머리카락을 내 주었었나 보다.
머리가 세기 시작해서 서른 중반이 되었을 때 이미 속머리는 흰머리 투성이었다.
우리 어머니가 내 흰머리를 뽑아주시면서
"시에미가 며느리 흰 머리 뽑아준다"고 혀를 끌끌 차셨지만 그런 소리도 하나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을만큼
세아이들에게 정신을 빼앗겼을때였다.
그래도 그 때 부지런하게 예비자 교리도 받아서 승범이 은진이 세례받게 하고 나도 세례받고 짧게 살았던 대구였지만
아이들에게나 내게 있어서는 인생의 한 획이 되어주었던 때였다.
물론 남편의 "전성기" 아니 "술성기"도 대구 살 때였다.
내가 기억하기로 가장 술을 많이 마시고 돌아다녔을 때였다.
하지만 나름 남편으로서는 낯선 객지에서의 직장 생활에서 자기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으라는 생각이 든다.
그걸 이해하는 데 돌고돌아 이십년 걸렸다.
그래도 BUT
누가 나한테 최면을 걸어서 남편이 가장 미웠을 때가 언제였었느냐고 물으신다면 아마 이렇게 대답할것같다.
읍내동에서 나기 시작한 흰머리는 제주도 이사 갔을 때는 이미 새치의 수준을 넘어서 염색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이 되었었고 춘천에 살 때는 대놓고 흰머리 염색을 주기적으로 했으니 흰머리 염색도 어언 십오년 쯤 되나보다.
원래 이렇게 살다가 나이 육십이 되면 염색을 안하려고 마음은 먹었었다.
눈이 자꾸 건조해지는 것도 염색 탓만 같았고 염색하느라 휴일을 염색방에 가서 앉아 있는 것도 좋지는 않았다.
게다가 우리 동네 염색방 아줌마는 말이 너무 많아서 염색하러 가면 오만가지 이야기를 다 듣고 와야 되는 것도
작정하고 가야 되는 마음가짐중 하나였다.
염색방 아줌마가 싫은 건 아니지만 다큐멘터리같은 일상 다반사를 기승전결로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염색방 아줌마 딸이 결혼 해서 이제 애가 둘인데 그 집 아이들 예방접종 맡히러 다니는 얘기까지
듣다 보면 염색이고 나발이고 얼른 집에 가고 싶을 만큼 조곤조곤 아줌마 이야기는 끝이 없다.
그렇다고 다른 염색방을 가고 싶지도 않고 - 왜냐? 아줌마가 싫은 건 아니니까 그저 말이 많을 뿐이니까
염색 한 번 하고 나면 육십까지 해야 할 숙제 중에 한 번 한 것 같아서 속이 시원하지만 그 시원함은
삼주면 끝
흰머리는 염색하고 다음 날이면 뿌리부터 삐쭉 올라오기 시작했다.
열과 오를 맞춰 같은 길이로 뿌리에서부터 올라오는 흰머리들을 보고 있자면 적이 따로 있나 바로 이런게 적이지 싶기도 했고 삼주정도 깔끔해 보이자고 삼주 후 하루 또 삼주 후 하루 이런 패턴으로 육십까지 간다는 것도 지긋지긋한 일이다.
마음먹으니 흰머리 염색하지 않으면 어때 그냥 이대로 살란다
아이들한테 엄마 이제 염색 안할거다 말했고 남편한테도 말하고 우리 엄마한테도 말했다.
아직도 우리 엄마는 염색을 하고 있으니 딸이 엄마보다 먼저 흰머리 되는 것도 마음이 안쓰이는건 아닌지라 말했더니
군산의 시크한 할머니 우리 엄니 황여사 "니 마음대로 해라"
우선 흰머리가 기존의 머리와 층이 지는게 최대한 적어 보이도록 일단 탈색을 했다.
노랗게 변해버린 내 머리- "사진의 머리는 내 머리가 아님"을 밝힌다. 다만 색깔이 같을 뿐
월요일 - 사직서를 제출하고 탈색한 노란 머리로 출근했더니 내가 멋내기 탈색을 한 줄알고
다들 한마디씩 하길래 "이제 흰머리 염색안하고 흰머리로 살려고 먼저 탈색했어요"라는 말을
구간 반복으로 여러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확실히 기존의 머리 색에서부터 흰머리가 자라는 것보 탈색한 상태에서 흰머리가 자라는 것이 훨씬 층이 덜 져보여
흰머리가 완전히 내 머리가 될때까지 기다리기가 더 수월할듯하다.
우리 아버지도 수술을 몇 번 하신 후에 스스로 염색을 그만 두셨다.
일찍 흰머리의 길을 걸으셨다.
처음에는 완전히 희어진 아버지 흰머리가 어색했으나 나중에서는 "아버지 김한길 같다"라고 내가 농담하면 웃으셨다.
아버지는 김한길보다 잘생기셨지만 우리 엄니 황여사는최명길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 참 멀다.
십오년 정도 염색을 해왔으니 짧지만도 않은 시간
그동안 머리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시간 투자하고 했던 생각하면 그걸로 충분히 할만큼 했다.
집에 와서 일주일있다가 구미로 다시 내려 간 수민이한테 다음에 집에 오면 엄마 완전히 할머니 되어 있을지도 몰라
그랬더니 엄마 흰머리보면 자기 마음이 슬플것 같다고 했다.
어떻게 저런 마음씨 예쁜 아이를 낳았나 - 수민이랑 바꾼 검정 머리가 하나도 아깝지 않다.
남편의 멋진 흰 머리를 보면 자연스럽게 흰머리를 기르는 일도 나쁘지는 않아 뵌다.
명절에 만나 술한잔 할 때면 남편의 남자 형제 중에 가장 말이 많고 시끄러운 셋째가 형 머리 염색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한다. 그다지 형제애가 돈독해 뵈지 않는 형제들처럼 보여도 자기 형 흰머리가 거슬리는 걸 보면 형제는 형제다.
둘이 형제가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얼굴이 너무 닮기는 했다마는-.-
하지만
"형수 형 머리 염색 좀 시켜요"라고 나한테도 잔소리를 하는데 그건 모르는 말씀이다.
남편의 흰머리는 우리 엄마도 그냥 두라고 할만큼 멋지게 났다.
우리 엄마가 이번 명절에 남편 흰머리를 보고 그랬다.
"자네는 염색하지 말고 그냥 두소"
앞머리가 브릿지처럼 멋지게 하얗고 어쨌거나 밉지 않은 흰머리 아저씨가 되어 가는 중이다.
흰머리를 기르려고 생각하니 하루빨리 이 머리가 전부 흰머리가 되었으면 하는 소원이 생겼다.
내 인생을 가급적 간소하게 사는 일에 대한 실천으로도 택한 흰머리 염색하지 않기
지구 환경까지 생각하면 못할 일도 없고
아마 4월 1일 제주도에 들어가서 한달동안 지내다 보면 어찌어찌 전부 흰머리가 되어 있지 않을 까 싶기도 하고
내일 하루만 무사히 마치면 뼈를 묻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생협에서 두발을 간신히 빼내게 된다.
장담한 일이 이렇게 무색한 걸 보면 돈버는 곳에 두발을 담그지 않는다는 소피아 언니의 통찰력이 부러울 뿐이다.
너무 열심히 달렸지
하루가 아깝게 일했고 내돈 버는 일도 아닌데 무리가 될 만큼 일하기는 했다.
몇달 일하고 장렬히 퇴사하는 나를 보면 삼심년 조금 안되지만 술마시고 새벽에 개처럼 들어왔을 때도 아침이면
사람이 되어서 출근했던 남편이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어떻게 한 직장을 그렇게 열심히 성실하게 다닐 수가 있었는지
염색을 할 때는 그렇게 빨리 기는 것 같더니 염색을 하지 않으려고 마음 먹으니 흰머리가 더디 기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는 지금부터 나오는 내 머리로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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