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까지 일하고 나오는 직장 - 소연씨가 "점장님 벌써 가게" 허둥지둥 하던 모습으로 나를 배웅해주고
소연씨한테 삥뜯어서 한봉지 가지고 나온 "우리밀 짱구" 생협에서의 최애 과자였다.
한봉지 까서 우드득우드득 소리 내면서 안양역까지 걸어오는데 직장은 없어졌지만 사람은 남았다는 기분
재고이동차 전 점을 돌다 나를 보고 퇴근하려고 서둘러서 돌아왔다는 ㅇㅇㅅ씨나 커피 좋아한다고 르완다분쇄커피와 쵸코렛 들려주던 ㅅㅇ씨 미들근무 끝내고 차로 수원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하던 ㅁㅅ씨
직장은 사라졌지만 사람은 남았다.
그
리
고
토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새벽까지 정말 죽게 아팠다.
"이렇게 아플수가 있을 까"누워도 아프고 서 있어도 아팠고 급기야 "코로나가 아닐까" 괜한 걱정까지 했지만
열이 없었던 걸로 봐서 코로나는 아니었으니 다행이었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아팠었던 "방콕 A형 독감"의 추억이 떠올랐을 만큼 몸이 아팠다.
내 몸이 기억하는 끔찍한 통증이 지금까지 세 가지가 있었으니
1. 초등학교 6학년 때 "방콕 A형 독감"
2. 전주에서 애들 키울 때 아팠던 감기몸살 -단순 감기가 아니고 대상포진이 아니었을 까 싶다.
3. 그리고 이번 감기 몸살
새벽에 일어나서 진통제를 먹지 잠을 잘수가 없었으니 - 직장을 정리한 휴유증치고는 너무 혹독한 몸의 뒷풀이
"무쇠팔 무쇠다리 로켓트 주머억 목숨이 아깝거든 모두모두 비켜라" 자기 인생의 OST 하나 꼽으라면 마징가제트의 주제가가 꼭 어울릴만큼 살았는데 알고보니 나도 허당이었다.
자기가 아는 자기와 남이 아는 자기와 실제의 자기와의 괴리감이라는게 있다.
나도 그게 심한 사람 중 하나.
아픔은 고스란히 자기 몫 100%
가족이라도 나눌 수는 없다.토요일 저녁에 지 에미는 앓아누웠어도 어김없이 주말이면 벌어지는 화서동 은진포차는 열렸고 항상 손님은 정해져있다. 승범이 은진이 남편 - 셋이서 웃고 떠들고 "지 에미는 아파 죽겠어도 안아픈 자들은 아픈 사람의 고통을 1도 모른다" 세상 사는 당연한 이치다.
아버지가 전북대 병원에서 앞으로 남은 생이 한달 남짓이라는 소리를 듣고 나왔어도 저녁에 끓여 먹을 라면 냄비가
없어서 싸구려 냄비를 사서 남편의 전주 관사로 돌아왔었다.
전주 관사는 남편이 잠만 자던 숙소라서 그릇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서 늦은 저녁 한끼 해 먹자고 마트에서 냄비부터 라면까지 잔뜩 사서 돌아갔었다.
아직도 가지고 있는 그때 샀던 냄비-보고 있으면 불효의 아이콘같아서 버리고 싶지만 냄비를 보면서 반성을 하게 된다.
엄마도 그랬다. 아버지를 중환자실에서 보고 나와도 서둘러서 수원에 올라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뭐라도 싸주지 못해 안달이었었고 그런 엄마가 어찌나 짜증이 나든지- 탈탈 털고 빈손으로 가곤 했었다.
기쁨은 나눌수 있지만 고통은 절대 네버 나눌수가 없다.
재수를 했던 은진이가 서울대에 합격하던 날
새로고침을 몇번이나 반복한 후에 열렸던 합격창을 봤을 때 - "passed"
첫 해에 서울대에 떨어졌을 때는 "Non passed"라고 써 있었다. 망할 새끼들 - 합격 불합격 놔두고 패쓰드 논 패쓰드 쓰고 지랄이야 했지만 옆에 있었던 것도 같다. 합격/불합격이라고
어쨌든 서울대의 합/불은 영어로 각인되어져있다. 내 뇌세포에 날카로운 조각칼로 새겨진 Passed
마침 아랫집 수리를 하러 오셨던 아저씨한테까지 "우리 딸이 서울대 합격했어요"라고 이야기를 했고 세상 꼴뵈기 싫었던 101호 할머니한테까지 이야기를 했으니 세상 말 다했다.
기쁨은 그렇게 나눌수가 있지만 내 몸이 아픈거는 절대 남과 나눌 수 없는 전부 나만의 고통이었음 - 끔찍한 아픔이었다.
산고도 그랬었다.
내가 부서져서 없어지는 느낌이 들어도 옆에서 간호사들은 웃고 떠들고 있었고 정오희 희망곡 시그널은 똑같이 울렸다.
한동안은 그때 겪었던 내 고통이 되살아나서 정오희 희망곡 시그널조차 듣기 싫었었다.
귀소본능인지 뭔지 월요일 이정도만 돼도 살만하다 싶을 때 군산으로 갔다.
엄마한테 빌렸던 650만원
큰돈도 아닌데 쉽게 갚아지지 않던 돈 - 아파트 전세빼주고 나니 갑자기 생긴 목돈의 쓰임새가 분명해졌다.
은진이 방 얻어주기/엄마 빚 갚기/은진이 아이패드 사주기
650만원 전부 현금으로 찾아서 엄마한테 드리고 엄마가 수고했다며 15만원 돌려주셨다.
"그리고 꼭 자기가 15만원 준 이야기도 블로그에 쓰라고"
"니 머리 니 마음대로 해라"고 큰소리 치던 엄마도 내 머리색깔을 보면서 아직은 젊은데 벌써 이래야 되겠냐고 회유에 들어갔다.들은 척도 안하니 서귀포에 가서 한 달동안 먹으라고 밑반찬을 열심히 만들어 주셨다.
멸치볶음에 감말랭이를 길게 채썰어서 함께 볶아주고 직접 말린 무말랭이 무침과 갓과 함께 버무린 파김치
간장에 담근 깻잎까지 엄마 반찬은 늘 무겁다.
왜 집떠나서 고생하냐고 잔소리를 하지만 일본에 갈 때도 엄마는 들기름에 묵은 김치 볶고 장조림을 해서 싸주셨다.
엄마 반친이 떨어져 갈 때 불안했던 마음 - 아직도 기억이 난다.
승범이가 한 달도 전에 촬영했던 "반의 반" 첫 방 군산에서는 TVN이 20-1번이라서 엄마한테 채널번호 써주고
함께 봤다.
네 명의 연주자들 중에 그나마 풀샷받고 딱 2초 등장했지만 엄마나 "나나 승범이닷" 동시에 외치고
유승범에서 유배우등극
집에서는 구박덩어리여도 밖에서는 어쩄거나 집보다 나은 대우 받고 사는 것 같아 다행이다 싶다.
딱 이번주까지만 아프고 탈탈 털고 일어나야지- 서귀포 가기 준비도 해야 되고
떠날 곳이 있어서 아파도 견뎌지는 걸 보면 나도 이게 병은 병이지 싶다.
"브람스음악이었는데 동영상 재생은 안되고 스크린샷 -뿌옇게 나왔어도 화면에서는 풀샷:
유배우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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