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함께 한 다는 것"
수원의 36도를 피해 공주로 내려왔다.
두번째 공주행으로 "공암리"와 "봉곡 2리"를 봤을 때 반가운 마음이 든다.
제주도 살 때는 애들 데리고 제주도를 한 바퀴 돌면서 놀다가 우리 동네 "애월 소길리"가 가까워 지면 마음이 그렇게 반갑더니만
이제는 "반포가스"라고 쓰여진 트럭을 봐도 마음이 친근해진다.
어디든 잠시 머무는 곳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일년 살았던 교토도 나에게는 그리운 곳이 되었다.가끔씩 생각나는 카모강과 카와라마치 산죠의 거리들
하지만 아침에 학교 갈 때 더웠던 일본의 여름 특히 교토의 여름을 생각하면
방마다 에어컨을 팡팡 돌리면서 좁은 집에 에어컨 세 대를 돌리고 사는 우리집의 풍요로운 전기를 생각하면
여름에는 화서동 우리집이 최고다.
옥상에 설치 해둔 태양광 전력판의 덕분이지만 그걸 설치할 때 목돈이 팍하고 들어간 것은 다 잊어버리고
한달에 오천원 이쪽저쪽에서 나가는 전깃세만 싸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제 우리 성당의 입당 미사가 있었다. 새로 짓는 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새로운 성당에서 입당 미사를 드리기 까지 시간이 꽤 지났다.
성가대가 부른 특송은 "베토벤의 신의 영광" 바로 위에 올린 곡이다. 비록 우리가 부른 곡은 아니지만 우리도 저 곡을 불렀다.
승범이는 바이올린 은진이는 클라리넷 그리고 승범이 학교 후배와 선배를 불러 비올라와 첼로까지 콰르텟으로 연주를 했다.
구 성전에서 새로운 성당까지 낡은 빌라와 주택들이 촘촘한 화서동에 우리 성당의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자
성당 앞을 지나다는 일도 즐거워졌다.
낡은 성당에서 성가대를 시작했었다.
내 인생에서 성가대는 두번째였었다.
제주도 "하귀성당"에서 숫자가 10명쯤 되는 성가대에서 성가대를 시작했었고 화서동 성당에서 성가대를 다시 시작하면서
노래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호흡을 해야 되는지 아직도 잘 모르지만 조금 알게 된 것도 같게 되었다.
지금은 25살이 된 승범이도 18살 떄부터 화서동 성당에서 바이올린 반주 봉사를 시작했고 은진이는 6학년때 성탄절에
반주를 잠깐 도와주게 된 것부터 시작을 했다.
그때 은진이는 학교에서 다리를 다쳐서 기브스를 했었는데 깁스한 다리로 좁은 2층 계단을 올라가서 반주 봉사를 했었다.
아이들이 그렇게 잠시 쉴 때도 있었지만 연주할 때마다 칭찬을 해주시던 사람들 덕분에 아이들도 쉬다가 나오다가 그러면서
시간이 가고 대학도 가게 되었다
승범이는 군대에 있을 때 휴가 나와서 새벽에 들어와서 아침에 두 시간 정도 자고 교중미사에 나와서 자기 바이올린을
쥐고 졸다가 바닥으로 떨어뜨려서 울림이 좋았던 성당에 쨍하고 악기를 떨어뜨렸던 적도 있었다.
그때 성가대석에서 나는 아래로 푹 꺼져버리고 싶을만큼 욱했었는데 엄마인 나는 열이받건 말건
신자들은 늘 승범이를 칭찬해주고 연주 잘 들었다고 인사를 해 준 덕에 아이들도 잘 성장했던 것 같다.
특히 구 성전에서 기억이 나는 일은 좋지 않은 일로 자녀를 잃었던 분이 잠시 성당에 나오는 일을 쉬다가
다시 나오셨을 때 미사 중간에 들어오신 그 분을 위해 신자들이 미사 중간에 박수를 쳐주면서 그 분을 마음으로 위로해 드린 일이
기억이 난다.
우리들은 늘 미사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그 시간을 위해서 미사를 드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감실에서 신부님이 성체를 꺼내 포도주와 성체를 함께 모시고
신자들에서 나눠주는 영성체의 시간 - 그 짧지만 임팩트 있는 영성체의 의식이야 말로 카톨릭 미사의 꽃이며
미사를 드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영성체 후 짧은 묵상시간에 아주 많은 것들이 휙휙 지나간다.
혼자서 잘나서 살아가고 있는 것같아도 우리들은 늘 보이지 않는 위로를 받기도 하고 상대방은 모르는 위로를 살짝 주기도 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걸 카톨릭 신자가 되고 나서 알게 되었다.
성당이 지어지고 마무리 공사와 청소를 하는 사람들로 입당 미사 하루 전날이 분주했다.
돈 페페 알바도 주중에 삼일만 나간게 주급으로 받은게 벌써 세 번이니 어디 나가서 일하고 한 달 채우는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돈 버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시급이 얼마이건 남의 돈을 받는다는것은 책임감과 무게가 따르는 법
알바지만 알바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여기서 수익을 창출해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하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일본에서의 빵집일은 빵집일대로 밤부 일은 밤부대로 쉽지 않았었다.
엔화벌기도 쉽지 않았고 원화벌기도 쉽지 않은 -.-
돈 페페도 마찬가지다. 쏟아지는 주문과 사람들로 정신이 없어서 주문받은 메뉴를 빼먹고 가져다 주지 않기도 했고 주문했다고
생각해서 갖다 줬는데 아니라고 해서 사장부인인 영경씨와 욕을 하면서 우리가 대신 먹은 적도 있었다.
비싼 와인 주문한 사람의 와인을 열다가 코르크 마개가 살짝 뿌셔져서 긴장해서 쉐프에게 부탁해서 뚜껑을 연 적도 있고
짐빔 애플 하이볼을 화이트 하이볼로 만들어서 가져다 준적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수는 실수대로 너그러이 봐주는 면들이 있었다.
그래도 실수를 반복하면 안되니 늘 긴장하고 일을 하게 된다.
아르바이트지만 내 마음가짐은 매니저의 기분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지난주에는 드디어 사장 부인 영경씨와 합의하에
직급을 "매니저" 님으로 승급시키고 초고속 승진 줄을 탔다.
하하하 알바 삼주만에 매니저 된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껴
주급받아서 사카모토 선생님 한달 수업료도 드리고 슬기로운 알바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은 이박 삼일로 카톨릭 청소년 교향악단의 캠프에 선생님으로 따라갔고 막내는 태백에서 전지훈련중이다.
여름에는 좀 시원하다고 태백으로 가지만 이제는 테백도 덥기는 마찬가지
새벽 운동에 점심 운동에 잠시 쉴 틈이 없는 막내가 너무 힘들다고 전화가 왔다.
부모지만 해줄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
세상에는 자기만이 견뎌야 되는 삶의 무게라는 게 있고 우리 아이들도 부모인 우리도 그걸 견뎌나가는 중이다.
어제는 성당에서 연주하고 10만원씩 페이를 받은 우리 애들이 연주 끝나고 연주자들끼리 식사를 했는데
오빠가 눈치없이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칠만원이 넘게 나왔다면서 은진이가 엄마 돈 아까운줄을 모르냐고 오빠한테 잔소리를 하고
나한테 오만원을 주고 다시 캠프로 돌아갔다.
미사후 성가대 연습을 하고 돌아왔더니 화장대 위에 오만원이 얌전히도 있었다.
눈치없는 아들이 있으면 그렇게 눈치빠르고 엽렵한 딸도 있으니 살아지는 것이다.
수원은 오늘도 덥디 더운 날이지만 공주는 최고 기온 31도라는 무려 5도가 낮은 기온이다.
아침에 새소리가 시끄러워서 잠을 깼다.
이게 휴가지 별거냐 별장에 왔다고 생각하고 이박 삼일 아자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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