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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일기

D21

by 나경sam 2019.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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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21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이제 어지간히 정리할 것들은 정리가 되었고 특별히 신경쓸만한 일들도 없을만큼 "평화"다.

가기 전까지 알바를 대폭 줄였기 때문에 기타무라를 볼 일이 별로 없어서 내 일상이 평화스러워졌다.

내 목표는 내가 왔을 때 들고 왔던 가방 그대로 들고 가는 "미니멀라이프"가 목표이기 때문에

그동안 옷도 사고 싶었지만 꾹꾹 참고 남편이 왔을 때 우선 꾸려놓은 짐가방을 그대로 보냈다.

내가 갈 땐 그야말로 바지 두벌과 윗옷 두개로 돌려막기 해서 입고 작은 짐가방에 모든걸 꾸려서 갈 생각이다.

지구를 위해서 쓰레기를 늘리지 않고 싶다.

남편이 금요일에 와서 일요일에 갔다.

작년에 처음 교토에 올 때 가방들고 함께 왔고 징글징글 더웠던 작년 여름에 다녀가고 겨울에 다시 왔다.

함께 다닐 때마다 지난 여름에 더웠던 생각이 새록새록 났다.

내 인생에 그렇게 더웠던 여름이 있었던가


하루라도 치열하지 않게 산 날이 없었다.

남들은 교토까지 가서 왜 그렇게 사느냐고 좀 쉬엄쉬엄 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게 좋았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혼자서 근 1년을 버티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못해서 산다는 남편이 내가 돌아오기를 아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때 돌아가는게 맞다.

"박수칠 때 떠나라"가 아니고 "박수칠때 돌아가야 된다"

이제 당신없어도 살 수 있겠어 더 있고 싶으면 있어 그렇게 말해도 서운할수도 있으니 돌아오라고 온갖 싸인을 보낼 때

들어가야지 싶어졌다.


교토에 왔어도 남편이 가지 못한 곳이 많았다.

"청수사"도 못갔었고 "은각사"도 못갔었고 "금각사"도 안갔었다.

교토 관광에 빠지면 서운한 곳들을 다니고 그동안 나도 못가본 "인화사"도 함께 갔다.


886년에 세워진 착공해서 888년에 완공된 왕실의 사찰로 천황이 퇴임후에 주지를 지낸 사찰이기때문에

부와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찰이었다고 한다.



인화사를 나와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버스 정거장에서 좀 떨어진 밭두렁처럼 생긴 곳에 둘이 앉아서 등뒤로 쏟아지는

따뜻한 햇볕을 받아가면서 아침에 둘둘 말아 얼른 싼 김밥을 먹었다.

김밥 싸기 대회가 있으면 아마 나는 빠르기로는 3등안에 들 자신이 있다.

애들 키우면서 특히 제주도에 살 때는 김밥을 정말 많이 쌌다.

일요일이면 집에 있는 재료 아무거나 집어넣고 둘둘둘 김밥을 싸서 차안에 부르스타 가스렌지 하나 넣고 컵라면만 가지고

애들을 태우고 일요일마다 나갔다.

애들 인생에서도 우리 부부 인생에서도 그때가 가장 재미있었던 때가 아니었을까싶다.

그때 정말 김밥이라면 더 이상 빨리 쌀 수 없을만큼 스피트가 붙어서 휙 하면 한 줄 휙하면 또 한 한줄


이젠 애들도 없는데 둘이 나가는데도 뭔가 허전해서 김밥을 싸서 나가서 먹을데 없으면 다시 들고 들어오지 했더니

인화사 앞에 공터가 있어서 거기서 옛날 이야기해가면서 김밥을 먹었다.


집에 와서는 회덮밥까지 만들어서 먹었다.

식당 알바 7개월이면 회덮밥을 만든다.

사실 회만 위에 쌱 얹으면 되는거라 어려울것도 없는데 집에서는 해먹지 않았던 음식이었다.


그런데 밤부에서 알바하면서 회덮밥도 만들다 보니까 이제 집에서도 만들어봐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 무렵 남편이 온거다.

혼자서 해먹기는 좀 부담스러워서 남편이 온 김에 이세탄 백화점 지하에서 천연 횟감으로 사다 먹었다.

이박삼일에 밥 한끼만 사먹고 나머지는 전부 집에서 먹었으니 아직 한달도 남지 않은 귀국일에 맞춰서 연습은 충분히 했다.


남편이 돌아간 날이 큰 애 생일이어서 남편은 집에 가서 아들 미역국을 끓여 주었고

이제 그 미역국을 나도 내 생일이면 얻어 먹을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년도 되지 않았던 시간이지만 남편이 미역국을 끓이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거는 대단한 일이 아닐수없다.


남편이 일요일에 돌아갔고 화요일에는 막내 수민이가 제주도에서 전지훈련을 마치고 제주도에서 곧바로 교토로 오기로 했다.

겨울방학이지만 집에도 못가고 곧바로 제주도에 가서 겨울 동계훈련을 하느라 힘들었을 우리 막내가 제주도에서

교토로 오면 옷도 사주고 둘이서 그동안 못가본 맛집을 찾아서 가야지했다.


그런데 어제 출발 수속을 하려고 제주 공항에 갔던 막내가 울면서 전화를 했다.

여권이 만료되어서 출발을 못하게 되었다는것

세상에 그런 일이 있긴 있었다.

자기 여권이 만료가 언제인지 모르고 있었던것이다.

여름방학때 올 때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 여권 날짜를 체크하지 못했던거다.

가끔 그런 사람이 있긴 있는지 인천공항에서는 긴급여권 발급 시스템이라는게 있던데 지방 국제공항에서는 아직 그 시스템이 없었다.


수민이는 그래서 못왔다.

울면서 전화 한 번 하고

애 우는게 안쓰러워서 나도 맘이 편치 않았지만 어쩌겠어 그런 수업료도 있으려니 하고 넘어가야지

자기가 알아서 티켓 취소하고 부산까지 티켓끊어서 결국 여동생 집에 가서 하루 자고 다시 숙소로 넘어갔다.


우리 식구들 모두 "막내 힘들었지.속상했지.애썼어.다음에 가면 되니까 너무 속상해하지마"위로해줬다.

나는 한편으로는 우리 막내가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기가 힘들 때 위로를 해줄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걸 알고 잠깐 속상했던 마음은 떨치기를 바란다.


우리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여권 만료기간도 안챙기고 뭐했냐" 그런 소리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었으니까


무사히 숙소로 돌아갔다는 카톡을 보내면서 자기 친구가 엄마 갖다주라고 고구마말랭이를 싸줬는데

엄마한테 그걸 못갖다줘서 너무 속상하다고 하는 우리 막내가 너무 사랑스럽다.


이제 수업은 시험을 보기 위한 마지막 단원에 들어갔다.

2월 시간이 가장 빠른것같다.

3월에 홋카이도를 가기 위해 티켓과 료칸을 예약해두었고 교토에서 생활도 이제 진짜 얼마 남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고 스타벅스에 오랫만에 와서 늘 앉던 자리에 앉아서 블로그를 썼던 지금 이런 시간들


아마 그리워질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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