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 1때 만난 어린 것들이 쉰 여섯살이 되었다.
내가 내 친구네 집 중에서 가장 많이 갔던게 얘네 집
혜숙이는 언젠가 하루 단기 가출을 해서 우리집에서 동생들이랑
끼어서 하루를 잤었다.
우리 엄마가 그랬다. 집 나갔던 사람들도 섣달 그믐에는 들어가는데
혜수기는 나왔다며, 재워줬다.
중학교 기술 선생님이셨던 혜숙이 아버지가 설계한 넓고 좋은 자기 집 놔두고
무슨 반항이었는지 모르지만 멀리 튀지는 못하고
겨우 걸어서 칠분 거리, 우리집으로 가출을 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말고는 같은 반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명산동 말랭이를 넘어 고등학교를 함께 걸어다녔고
일요일에 시험공부한다고 학교에 함께 가고
대학교 때 서로 다른 학교를 갔는데 나는 혜숙이가 다녔던 전산통계학과
과 친구가 장학금을 타면 혜숙이 과 친구들 틈에 끼어서 장학금 턱을 얻어먹었다.
우리 엄마 말대로라면 둘이 징글징글 붙어 다녔고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반 9반애들보다 혜숙이네 6반 애들이랑 친했다.
고 2 겨울방학 때는 등용문 독서실과 고 3때는 집 근처 고려 독서실을 끊어서 함께 다녔다.
대학들어가서 잘난 사람되어보겠다고 공부를 했지만 머리식힌다고 공부한 시간보다 자전거를
더 많이 탔고 심심하면 독서실 아저씨 흉을 봤다.
고려 독서실 아저씨 고려대 나온 줄 알았더니 법원에서 매점하셨다더라
등용문아저씨 수학 잘 한다고 어떤 애가 수학의 정석갖고 가서 풀어달랬더라
궁금한게 많았고 할 얘기는 더 많았고 먹고 싶은 건 더 더 많았던 나이였다.
유치의 끝을 향해서 놀았지만 가끔은 혜숙이네 집에서 둘이 심각하게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듣기도 했다.
혜숙이 반에 어떤 애가 50원 넣고 하는 갤러그에 푹 빠져 가산탕진을 경험하고
자기 엄마한테 갤러그 사줘 했더니 그게 뭐냐고 공부하는거면 사준다고 했다던
얘기를 듣고 명산동 사거리쯤 오락실에서 혜숙이랑 술마시고 나사빠진것처럼 웃었는데
갤러그 사달라고 했던 그 애도 우리처럼 나이먹고 잘살고 있겠지.
수녀원 앞에서 혜숙이를 기다리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성모님께 의탁했다.

나는 스물 일곱에 결혼했고 혜숙이는 스물일곱에 수도회 입소해서 4년을 보내고
수녀님이 됐다.
살레시오 수녀원 안에 있는 성당에 함께 가서 부활의 예수님께 첫 줄에 앉아서
함께 기도를 드렸다.
고민없고 힘들지 않는 삶은 없다.
나는 나대로 수녀님은 수녀님대로 각자 몫의 고민과 삶의 방향성이 우리들의 숙제다.
제주도로 발령이 나서 마음이 바빴을테지만
뜨뜻한 만두전골 먹고 커피 마시고 보라매 공원 걷고 시간을 많이도 내줬다.
성대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기다리는데 쌀쌀했다.
버스는 차고지대기라고만 뜨고 마음은 노곤해서였을까
집에 와서 남편을 보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펑펑 울었다.
열 네살이 쉰 여섯이 된 서러움
얼굴로 헤어진지 이십 구년
목소리와 글로 헤어진지 이십 일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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