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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아트박스...

by 나경sam 2023.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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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 백화점이 두 개 있었다.
동아백화점, 나드리백화점
이름은 백화점처럼 생겼지만 생각해보면 마트보다 작았던 작은 쇼핑센터같았던
그 곳을 우리들, 군산 여학생들은 백화점이라고 불렀고
동아 백화점 구석 코너에 있던 예쁜 문구점 팬시아트를 자주 들락거렸었다.

대학교를 안갔던 친구가 거기 취직해서 일했다.
친구있다는 핑계로 천원짜리 인형하나 안 살거면서 자주 드나들었는데
사지는 않고 손으로만 쓰다듬고 다녔으니 "땡땡씨 친구들 왔네" 하면서
눈으로는 웃었던 여자 사장님이 웃어도 웃는게 아니었을테고 내 친구는 우리때문에 곤란했을텐데
스무살이라 눈치가 없어서 몰랐었다.

신포우리만두 가께우동이 600원, 쫄면이 800원, 500cc 생맥주가 500원이 안될때였는데
친구가 일하던 아트팬시 문구에서는 편지지가 천원이었으니
샀겠냐고, 그 돈있음 쫄면을 사먹지

그래도 보는 눈들은 있어서 이거 예쁘다 저거 예쁘다 손으로만 쓰다듬고
안사고 우르르 나와서, 시내 한 바퀴만 돌면 만난 사람 또 만나고 이길이 그길이고
저길이 이길이던 군산 시내가 어릴 때는 그렇게 좋았다.
이성당도 그때는 지금처럼 유명하던 시절이 아니라 이성당 앞에서 줄서서
빵사는 사람들을 보면 군산 사람으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메이커 붐이 불던 때였고 나는 메이커 병에 걸린 환자였다.
사고 싶은 옷들이 군산 명동 시내에 줄줄이 있었지만
엄마한테 그린 에이지 블라우스 하나 사달라고 졸라서 겨우겨우 옷가게에 함께 갔다가
블라우스 한 장에 만구천이라는 소리에 엄마가 뒤도 안돌아보고 나를 끌고
밖으로 나와서 내가 얼마나 챙피했었는지 엄마는 기억도 못할거다.
군산에 산다는 집 여자애들은 다 입고 다니던 그린에이지 블라우스에 체크치마
랜드로바 방울 구두

일본어로, 잔넨나가라(유감스럽게도)
얻어 입질 못했지만 아버지가 엄마 말 안듣고
사주던 프로스펙스 운동화와 가방으로 메이커 병을 달래며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다 한 번은 엄마도 여름 티셔츠 정도는 적당히 타협해서 페페로네 반 팔 티 선에서는
메이커 옷을 사줬으니, 입이 나올만 하면 그렇게 싼 메이커로 얼러가면서 우릴 키운것 같다.


군산이 경기가 좋던 그 시절 쑥쑥 생겨나던 수많은 메이커 옷 집들, 가게들 중에
아트박스도 그 때 생겼다.
내친구가 일하던 팬시아트가 짝퉁 문구였다면 여기는 진짜같았던 문구의 신세계였다.
아트박스 구경가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쓰다듬어도 주인이 눈치도 안주고
샀으면 하는 애처로운 눈길도 없으니 눈치도 없었고 싸가지도 없었던 스무살짜리들은 팬시아트를
정리하고 아트박스로 노상 출근을 했고, 동아백화점 안에 있던 친구가 일하던 팬시아트는
문을 닫았다.

아트박스를 자주 들렸어도 사는 건 어려웠다.
돈이 없었으니, 마음에 들어도 살 수 없던 스무살이었다.


스무살 때는 천원짜리 하나 사기 어려웠던 아트박스였는데 오늘은 십만원어치라도
맘 먹으면 살 수 있는 아트박스에서 쇼핑을 했다.
내일 수녀원으로 혜숙이를 보러 간다.

체리키링키트,썬크림,디퓨저

아트박스에 별게 다 있었다. 체리가죽 키링 키트, 핸드 크림, 디퓨저를 아트박스에서 사고
올리브영에 가서 주고 싶은 것들은 찬찬히 골랐다.

샴푸,썬크림,링클밤,유산균

제주도로 발령이 났다는 혜숙이에게 썬크림 어떤게 좋을까
내 거 살때는 귀찮아서 테스터 발라도 안보고 사는데 신중하게 손등에 발라보고
직원에게 도움받고 고른 썬크림

제주도는 습기있고 퀴퀴할 수 있으니까 방에 놓을 디퓨저
주름펴고 살라고 앰플 밤, 언제나 필요한 유산균,열받은 머리 식혀줄 두피 쿨링 샴푸
가방에 걸고다니라고 키트 사서 직접 만든 체리 가죽 키링 (하지만 망했다. 바느질이 울퉁불퉁합니다요)

친구에게 줄 선물을 고를 때 돈 걱정 안 할 정도면 부자아닌가, 셀프부자선언 합니다요ㅋ
어릴 때는 돈이 없었고 대신 젊음이 있었지만 이젠 돈이 있으니 젊음이 사라졌다.

그래도 곱게 나이먹었을 소중한 수녀님 내 친구, 그럭저럭잘 살아온 나.
선물을 챙겨서 내일은 수녀원엘 간다.
젊음이 사라졌어도 그럼 어떠냐. 내일이 있다는게 중요하지
그런데 잠이 안온다. 아유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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