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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대출 0원

by 나경sam 202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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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살다보니 대출 0원이 되는 날이
드디어 내 인생에 찾아왔다.
설마 로또 5만원 당첨 두 번 됐다고
남은 대출금 다 갚았겠어
아니면 남들 몰래 로또 당첨된 돈으로 갚았겠어
남들 모르는 당첨금도 없고
눈 먼돈이나 검은 돈이 들어 온 일도 없고
대출상환자금은 둘째가 전세를 뺀 돈이다.


빚에도 역사가 있다.
1994년 4월 3일 결혼해서 살던 집
전주 송천동 신일아파트
스물 일곱에 공무원 시작한 섭섭씨가
몇 년동안 월급을 거의 때려박고 장만한 새 아파트였지만
국민주택기금 1200만원인가 대출금으로 있었다.

한 달에 10만원 정도 갚았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야 돈 가치가 1000만원이면 100만원같은 세상이지만
그때는 섭섭이 월급이 정말 섭섭할 때라서 대출금 갚는 것도
힘들긴했다.
시작은 1000만원 초반대였으나
빚이란게 늘면 늘었지 없어지지 않는 밭에 난
풀같은거라는걸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알겠다.


빚이 느는데 이유는 있다.
집살때 대출로 한 번에 억대의 빚이
바다 한 가운데 섬이 불쑥 솟은것처럼 생겨났었다.

이자 한 번 밀려가지 않고 열심히 갚았지만
그 무렵 큰 아이랑 둘째가 렛슨비에 돈을 열심히 쓸 때라서
이상하게 빚은 갚아지지 않고 야금야금 늘어갔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함께 벌어서 가르치고 빚도 갚아갔다면
섭섭이 혼자 감당하는 살림살이보다 나아졌겠지만
불규칙한 돈벌이를 했기 때문에
빚은 꾸준히 늘었고
빚이 느는 체감보다 아이들이 렛슨비에 쓰는 돈이
빨리 늘어간다고 느꼈고
지금은 어찌해볼수도 없는 이마의 미간주름도 그때
확실하게 패인것같다.
애들 렛슨은 선생들이 시도 때도 없이 부르니
주말에도 애들 데리러 다니느라
지금처럼 섭섭이랑 놀러 다닐 여유도 없었다.


애들은 서로 눈치를 보고 컸다.
셋째는 오빠랑 언니한테 돈이 너무 들어가서
엄마가 힘들어하니까
어쨌든 자기가 아끼고 아껴서 살아야겠다는
소녀가장같은 결심을 이미 중학생 때 했다고 했다.

큰애는 중학생 때 유행하던 노페 바막을
그 당시 중학생이면
거의 입고 다녔던 걸
사달라고 하지 않았다.
자기는 없었지만 조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사줘야 된다는 생각도 못했었다.
당장 일주일에 몇 번이나 나가는 렛슨비가 급해서
그게 지금 생각해보면 사채빚같은 무서운 존재였다.

둘째도 뭘 사달라고 조른 적이 없다.


갖고 싶은게 많았을텐데
시댁이나 친정에 갈 때 셋중에
하나나 둘이 빠지고 내려가서 갔던 사람만
용돈을 받으면 집에 와서 가지 않았던
나머지 사람에게 받았던 용돈을 자기들만의
룰로 나누고 살았다.
직접 내려간 사람이 5 안 내려간사람은 2.5:2.5
뭐 이런식으로 그게 우리집 국룰이었다.

3단서랍으로 시작했던 빚살림이
5단이 되고 7단이 되는구나 느낄 때 즈음에는
국민은행 대출란에 한 줄 씩 더 생겨나는 대출금현황이
그냥 함께 살아야 되는 몸의 일부같았다.

이자 열심히 내고
조금씩 갚고 빙하를 녹이는 주전자 물처럼 살았다.

세상에 자식들처럼 이쁜것들도 없고
자식들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

평생 함께 살아야 될 옛날로 치면 남편의 첩같던
애증의 빚도
애들이 돈 가져 갈 일이 줄고
스스로 벌어서 쓰면서 우리 돈에서 독립하고나니
섭섭이랑 함께 빚 갚아 나가는 재미가 있었다.


드디어 둘째가 졸업하면서 봉천동 원룸을
빼고 목돈을 부친 날
혼자서 떨리는 마음으로 대출금을 깠다.

섭섭이는 빚깐 것 까지 블로그에 쓰냐고
그런것까지는 쓰지 말라고 하지만
일기장 검사받는 초등학생도 아니고
이 블로그의 주인은 나다.
쓰고 싶으면 쓰는 거다.

국민은행 홈페이지에서 두 개 남아있던
대출금을 갚던 날
집에는 나 혼자였다.

그 많던 빚이 0원도 될 수 있다는 걸
지금도 물론 큰 애 학자금도 섭섭이 월급에서 자동으로
상환되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은행에 갚을 돈은 없게 됐다.
속이 시원했고
갬성 아줌마 아니랄까봐
울뻔했다.

와인이 남아있길래
혼자서 대출금 0원 화면보면서 홀짝 홀짝
마셨다.

스물 일곱부터 시작 되었던 빚잔치가
쉰 다섯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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