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우체국앞에서"
가을 우체국 하니까
은행잎이 눈처럼 소복이 쌓여 있을 것 같은 시골의 우체국이 떠오른다.
글로 쓰고 보니 우체국이라는 말도 참 생소하고
마음에 와닿는 정서적인 느낌이 따뜻하다.
언제 우체국에 갔었지
아들이 군대에 있을 때 뭘 보내려고 큰 우체국에 가서 소포를 한 번 보냈던 것 같고
딸이 거래하는 중고거래 싸이트에서 물건을 팔았을 때
그걸 부치러 우리동네 우편 취급국(작은 싸이즈의 민간 우체국)가던 것 말고는 별로 없다.
우체국을 가장 많이 이용하던 나이는 역시나 이십대 대학생 시절이었다.
정작 나는 읽지도 않는 학보를
다른 대학교에 다니던 내 친구 혜숙이에게 보냈었다.
지금 생각하면 뭐하는 짓이었는지 싶지만 그때는 잉크 냄새도 가시지 않은 학보에 메모같은 짧은 편지를 덧붙여 보내곤 했었다.
중학교 1학년때 같은 반이 되어 고등학교 3년 내내 붙어 다니고 동네에서도 허구헌날 붙어 다니던 친구였으면서도
학보따위를 보내는 짓을 했다니 지금은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그때는 또 그걸 멋으로 알았었는지-.-
내가 결혼 하던 1994년에 혜숙이는
"살레시오" 수녀원에 입소를 했다.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소하기 전 혜숙이와 나는 여행을 함께 갔었고
그게 혜숙이라는 이름을 쓰는 마지막 여행이었다.
둘이 함께 간 충무에서 여관을 잡지 못해 어떤 할머니 댁에 가서 삼천원인가를 주고 잠을 잤었다.
"살레시오" 입소 후에는 편비종투 발신인란에 혜숙이라는 이름 대신 "막달레나" 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왔고 못생긴 글씨체를 가지고 있는 혜숙이가 편지봉투 겉면에 막달레나라고 적어서 보낸것이
"나 이제 니가 알던 혜숙이 아니고 수녀님" 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아서 봉투를 뜯기도 전에
거리감을 확 느꼈던것같다.
동네 전봇대 가로등 아래에서
서로 비밀을 주고 받던 혜숙이는 없어지고 막달레나 수녀님이라니
그래도 전주에서부터 시작 된 편지는 대전을 거쳐 대구까지 몇 년동안 쭉 이어져
주로 나는 시댁 흉을 한바가지씩 써서 보냈고 혜숙이는 수녀원의 일상을 써서 보냈었다.
우리 아이들이 세례를 받던 1999년도에 세례명이 필요할 때도 혜숙이는
"프란치스코" "안젤라" "소화데레사" 라는 멋진 이름을 아이들 앞으로 작명해주었고
우리 애들은 혜숙이 덕분으로 본인들 마음에 들든 안들든
세례명이 그렇게 정해져서 자기 이름 외에 이름 하나를 더 가지고 살고 있다.
수녀님 친구를 뒀어도 세례는 무척 늦게 받아 나도 아이들이랑 같이 1999년에 대구 칠곡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카타리나,세실리아,스텔라
멋지고 럭셔리한 이름들중에서 내 세례명을 정하려고 마음을 먹었었다.
하지만
내 세례명은 안투사 (Anthusa)
바로 혜숙이가 수녀원에서 종신서원을 받기전까지 이 세상에서 쓰던 세례명이다.
(수녀님들은 종신서원을 하게 되면 그전에 쓰던 세례명을 더 안쓰고 새로운 이름을 쓰는것같다)
안투사라는 세례명을 다른 사람들이 메두사라고도 놀렸다던 그 세례명을 내가 쓰게 된것이다.
셰례명이 예쁜 이름들을 놓고 고민을 많이 했는데 갑자기
안투사라니
그건 운명이다.
그냥 친구가 스물 일곱까지 쓰던 세례명을 내가 가져와야지 하는 마음이 불쑥 들었고
카타리나와 세실리아의 유혹을 떨치고 나는 안투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간혹 신부님들 조차도
"안투사"라는 세례명은 처음 들어 본다면서 물어보실 때는 대략 난감하였으나
지금은 누가 내 이름을 "안투사"로 불러 줄 때 나는 그 이름이 참 좋다.
대구에서 살던 해 까지 혜숙이랑은 편지를 주고 받았고
그 이후에 전주로 이사를 가서는 간혹 전화를 주고 받았고
제주도로 이사를 가서는 전화도 편지도 하지 못한 체 지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몇 안되는 인간 관계중 으뜸이었던
혜숙이는
아주 몇 년전 연길에 파견 된 수녀님으로 지낸다는 이야기를 건너 건너 들었었고
나는 가끔 그 자식이 몹시 보고 싶어서 울었던 날도 있었다.
( 수녀원 편지도 군대처럼 검열이 있는지 편지 봉투 겉면은 꼬박꼬박 막달레나로 썼었고 편지에는 혜숙이로 돌아간 )
아직도 가지고 있는 혜숙이의 편지
99년도에 받았으니 전주에서였나보다.
카톨릭 신앙에 관한 책 한권과 함께 어느 이면지 뒷면에 써서 보내왔던 편지다.
저 때가 서른 다섯이 안됬을 때였을 텐데
늙었다고? 라고 써있다.
이제는 진짜 늙는 중이라고 고치고 싶을 만큼
편지도 혜숙이도 나도 나이를 먹었다.
거리에서 또래의 수녀님이 지나가면 혜숙이가 아닌가 해서 후딱 쳐다본 적도 많았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체념처럼
내 이름속에 안투사가 혜숙이 이름인데 얼굴 좀 안보면 뭐 어떤가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립긴 하지만 내가 안투사로 살고 있으니 이미 되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