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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팝송을 거침없이 부르던 우리집 3번 생일

by 나경sam 2021.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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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생일은 아니지만 생일에는 집에 못 올 것 같아서 왔을 때 생일잔치를 했다.

아이들 생일이 2,4,6월로 두달 간격이고 남편과 나는 하반기에 있으니

수민이 생일이 애들 생일로는 끝이라 이걸로 또 한해가 가나 그런 기분도 든다.

 

대구에서 낳고 아이엠에프로 공무원 보너스가 삭감이 됐어도

도저히 에어컨을 달지 않을 수 없었던 대구의 3층 관사에서

십 오개월도 터울이 안 지던 둘째가 쥐어 뜯을까봐 잡동사니 넣어두고 잘 쓰지도 않던

골방에 아기 침대 하나 대여해서 가둬놓고 키우던 셋째

 

생각보다 은진이가 아기였지만 동생을 받아들이는게 빨라서 질투고 뭐고 없이

순하게 동생을 인정하는 바람에 골방을 탈출했지만

생각해보니 은진이가 동생을 사람으로 생각하기 보다 뭔가 움직이는 장난감처럼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저도 십오개월이었으니 뭘 알았겠나

 

둘째도 셋째도 모두 아기였으니

생각해보니 안쓰럽다.

 

친정, 시댁 아무 도움도 못받았던 대구에서 다섯살 승범이가 큰 유모차에 수민이 태워서 끌고

내가 작은 유모차에 은진이 태워서 둘이 함께 소아과를 다녔다.

 

아기들이 아픈게 낮이고 밤을 가리질 않으니

급한대로 승범이를 남편처럼 써먹었다.

어쩜, 남편보다 나았을지도 모른다

 

셋째가 울면 둘째가 따라 울었고, 그럼 다섯살 승범이가 함께 울었고

마지막에는 내가 아이들과 스크럼을 짜고 통곡을 하고 울었다.

대구에서 전주로 다시 이사를 와서 어느 날 승범이가 나한테 물었었다.

"엄마, 우리 대구 살 때 왜 그렇게 울었지?"

 

대구 읍내동 관사 3층 안방에는 서른 한 살의 두고 온 내가 있다.

애들 키우느라 힘들었던, 젊었을 때의 내가 그 방에 앉아 있는 것 같아 이 글을 쓰면서도 괜히 눈물이 난다.

 

아직 삼십대였던 남편은 대구에서는 술도 많이 마셨고

타지로 발령받아 온 지 얼마 안됐을 때라 나름 적응하느라 가정을 충실하게는 못지켰다.

 

셋째 가졌을 때 개떡이 얼마나 먹고 싶던지

수요일마다 열린다고 해서 수요장이라 불렀던 조그만 장터에 가봤더니

대구 사람들은 전라도 사람들이 동그랗게 만들어서 먹던 개떡위에 콩고물을 묻혀 먹기 때문에

장터에 나와 있던 건 콩고물 묻은 개떡뿐이었다.

 

콩고물 묻힌 건 개떡도 안같아서 결국은 안사먹고 시어머니가 만들어서 꽁꽁 얼려서 보내 주셨다.

어머니 이야기는 흉밖에 안나올것 같아도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챙겨 주신 적도 있었다는 게 참 고맙다.

 

셋중에서 가장 우량아로 태어나서, 태어나자마자 얼굴이 자기 오빠랑 똑같아서

나를 두 번 놀라게 했던 우리집 3번

 

태어나자마자 남긴 족적과 스물 세 번 째 생일 케잌

 

저 발로 지금은 트랙을 달리고 있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 차 안에서 팝송을 틀어놓으면 들리는대로 부르던 언어의 천재였었다.

올리비아 뉴튼존 노래를 자기 귀에 들리는 영어로 누구 눈치도 안보고 맘껏 불러서

남편과 나는 올리비아 뉴튼존의 노래를 수민이 노래 듣느라고 많이 틀었었다.

 

제주도 이사갔을 때도 관사의 다른 집에서 놀고 집에 와서는

제주도 사람들이 습관처럼 쓰는 사투리 "무사"를 네살짜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썼었다.

 

생각해보면 누구 눈치도 안보고 영혼이 자유로운 아이가 우리 셋째 아닌가 싶다.

 

얼굴도 예쁘지만 마음은 더 예쁜 아이

 

대구에서 울면서 키운 보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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