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옥상으로 상추를 뜯으러 제법 다녔다.
빨래 널러 옥상에 가는 것도 귀찮아서 승범이 시킬 때가 많았는데 상추나 부추 쑥갓을 뜯으러 가는 일은
시킬 수가 없어서
왜냐 - 똥 손이거든
승범이의 손은 게임하고 바이올린 켤 때나 쓰는 걸로 합시다.
그런 손을 가진 승범이었는데
현충원 군악대에 있을 때 면회를 갔더니 손에 상처가 나 있었다.
7년 전 이야긴가 보다.
남편 없이 딸 둘만 데리고 토요일 면회를 갔는데 차 안으로 우리를 만나러 들어왔던 승범이가 어딘지 수상했다.
- 그때도 주말부부였을 때라 남편이 주말인데도 집에 없었던 것 같다.
엄마들은 대부분 알지
애들이 뭘 숨기려 하면 숨기려고 하는 것만 잘 보인다는 걸
손등에 뭔가 줄이 나 있고 유달리 거칠어 보이던 손등이 마음에 걸려
"승범아 너 손등 왜 그래"
물어본 순간 열아홉 살 우리 승범이 어린 군인 아저씨가 차 안에서 엉엉 울고 말았다.
우리가 면회를 오기 전 생활관 청소를 했는데 승범이가 청소를 했어도 계속하라고 더럽다고 어쨌든
위에 있던 녀석이 성질을 부려서 손등에 상처가 나도록 신데렐라처럼 청소를 하다가
상처가 난 것이었다.
그러다가 가족을 만나 엄마가 "너 손이 왜 그래"라고 물었으니 단전 밑에서부터 서러움이 폭발해서 울기 시작했고
승범이가 먼저 울고 나도 울고 은진이 수민이 우리 넷이서 좁은 차 안에서 소리 내어 울었다.
아직도 승범이는 그때 일을 속상해한다.
괜히 말했었다고, 아주 후회한다고 했었지만 울음을, 속상함을 나눠가지는 일을 하는 게 가족이고 식구지
밥만 함께 먹는다고 식구가 아니다.
토요일 아침
옥상에서 채소를 뜯어다 비빔밥을 해 먹었다.
오늘의 포인트는 오이다. 그동안 한 개는 벌써 따다 먹었고 한 개는 오늘만을 기다려서 따왔다.
바로 따 온 오이는 가시가 쎄다.
몇 포기 안되는 상추랑 쑥갓은 그동안 많이 먹어서 손바닥텃밭이 아작이 나버렸다.
그래도 몇일만 기다리면 또 새잎을 내주고 밀가루 반죽 넓히듯 넓혀준다. 너무 신기하고 기특한것들이다.
김자반,오이 채썰고, 상추, 쑥갓,조선부추 고추장 생들기름 넣고 비벼서 남편이랑 아침 한 끼
부족했던 채소들의 빈자리를 오이가 열몫했다.
집을 나가서 일주일에 한 번 집에 오는 딸도 얼굴 보기가 귀한 딸이 되었다.
수원에 렛슨 오는 길에 잠시 들러 우리랑 점심 한 끼 먹고 가는 일도 마음먹고 시간을 내야 할 만큼 바쁜 스물세살이다.
지난 주부터 집에 오면 비창 3악장을 쳐주는데 모처럼 집에서 들리는 제대로 된 피아노 소리에 행복했다.
남편도 나도 딸도 정신없이 배고파서 눈이 돌아갈 때 차려 낸 스테이크 점심
비빔면과 김말이 스테이크와 채소는 냉장고에 있던 채소 몽땅 소집 아스파라거스도 함께 구워서 호사스런 점심 한 끼
저녁은 금요일 대전으로 여행을 갔던 승범이가 성심당에서 사 들고 온 튀김 소보로 한끼
점심을 늦게먹고 튀김 소보로 한 개를 먹었더니 저녁은 그냥 땡
저걸로 삼시세끼중 한 끼는 해결
토요일 우리집 삼시세끼가 모두 끝났다.
1998년 대전 선화동에 살 때 그때도 성심당이 유명했었나
사람이 많긴 했었지만 지금처럼 유명하지는 않을 때였던것같다.
성심당이 있던 은행동이 우리가 살던 선화동 옆이라서 병원을 가려면 은행동 지하상가를 쭉 지나서
은행동에 있는 병원으로 가서 볼 일 보고 시내에 있던 동양뱍화점 지하에서 저녁거리를 사서 선화동 집으로
다시 지하상가를 거쳐서 돌아왔었다.
지하상가안에 있던 베스킨라빈스에서 싱글콘을 사서 한 개를 꼭 먹어야 했던 고집쟁이였었다.
그때는 싱글콘이 900원이었다.
눈물샘이 막혀서 눈물이 찔금찔금 나서 은행동에 있던 안과에서 네살 때 눈물샘도 뚫었었고
은행동 지하상가에서 정신없이 혼자 뛰어가다가 우리를 놓쳐서 미아가 될 뻔 한 적도 있었다.
지하도에서 승범이를 잃어버리고 남편이랑 나랑 얼마나 미친듯이 승범이 이름을 부르면서 찾으러 다녔었는지
둘째가 출산 달이어서 걷기도 힘들 때였었는데 승범이가 앞에서 뛰기 시작해서
지하도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순삭해버렸다.
아이들이란 종잡을수가 없는 법이다.
네 살짜리가 뛰기 시작하니까 사라지는게 순식간이었었다.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거니 했는데 지하도가 끝나는 지점에 가서도 아이가 없어서 그때부터 우리 부부가
거의 미친 사람들처럼 승범이 이름을 부르면서 찾으로 다니고 이렇게 생긴 아이 보셨냐고 물어봤으나
승범이는 없었다.
그 순간에 오싹했던 기분을 어떻게 잊을수 있을까
애를 잃어버리는 부모의 마음을 그때 잠시 알았다.
지하도 위로 남편이 계단을 순서대로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승범이가 없다고 했을 때 세상이 절망이었다.
다행히 마지막으로 올라간 지하도 계단 끝에 겁에 질린 승범이가 동상처럼 서 있었고
-겁이 많은 승범이가 계단을 올라가서 우리가 안보이니까 그냥 서 있었던 것이 미아가 되지 않은 중요한 포인트다-
만일 누군가를 따라갔더라면 그대로 우리랑 빠이빠이 할 뻔 했으나
무사히 우리집 자식으로 커줬고 사연많던 은행동에서 놀다가 오늘은 성심당에서 빵까지 사왔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
하마터면 두 딸들에게
사실은 너네 위로 오빠가 한 명 있었는데 네 살 때 대전에서 잃어버렸어
할 뻔 했던 우리 승범이
승범이한테 차려 준 저녁도 스테이크와 가지 구이
나의 하루도 세끼와 함께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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