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로 업고 앞에는 아기띠로 안고
승범이는 옆에서 걸었다.
큰 놈과 둘째만 터울이 졌을 뿐
둘째와 셋째는 15개월이 안되는 연년생이라
증말 저것들을 내 눈물과 관절로 키웠다.
유모차 두 대를
내가 하나
승범이가 하나를 끌고 소아과를 다녔는데
앞서가는 유모차는 내가 밀고
뒤에서는 승범이가 유모차 한 대를 끌었다.
승범이가 미는 유모차는 앞에서 보면
유모차만 굴러가는 것 처럼 보였다.

아직 어린 애가 유모차를 밀었으니
사람은 안보이고 유모차 한 대만
저절로 굴러오는것처럼 보였겠지.
대구 할매들이 난리가 나서 나한테 그랬다.
"아지매, 뒤에 유모차 굴러온데이"
"네, 뒤에 사람있어요"
스물 여덟에 전주에서 큰 애 낳고
서른에 대전에서 둘째 낳고
서른 하나에 대구에서 셋째를 낳아
친정이고 시댁이고 도움받지 않고
내 새끼는 내가 키워야 되나보다
허리병이 나서 일어나지 못한 날이 있어도
엄마들은 다 그런가보다하고 살았다.
대구 할매들이 유모차가 저절로 굴러간다고
대구 사투리로 놀래서 호들갑을 떨어도
전라도 아줌마였던 나는 기죽지않고
뒤에 사람있어요. 한마디 날려주고
소아과를 갔다.
승범이가 남편처럼 도와줬다.
그시절 남편놈은(그때는 젊었을때라 남편놈)
나름대로 열심히 직장생활 할 때라
주말이고 평일이고 바빴다.
집에 있는 시간은 많이 도와줬지만
없는 시간이 많았으니
쏴리-.- 남편놈이라 하겠어
젊은 날은 손에 쥐고 있던 풍선처럼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지금은 중년 아줌마
흰머리로 다녔을 때는 할아버지들이 꼬이는
나이가 됐다.
다시 들어간 직장에서는
이미 다져진 고집들로 껍질이 단단해진 사람들의
부침을 겪는다.
그들도 내가 그럴것이다.
성질 드러운 아지매
내 생애 가장 부드러웠던 시간은
저것들 기저귀갈며
손에 습진이 생기던 그때였나보다.
쟤들이 웃으면 나도 웃었고
쟤들이 울면 나도 울었던!!
대구에서 정말 우리 넷은(남편놈 빼고 나,1,2,3)
전우애로 똘똘 뭉쳐있어서
떡애기 셋째가 울면
두살 둘째가 울고
동생들이 우는 걸 보고
다섯살 큰 애가 울었다.
그리고 마음이 폭폭해진 내가 울었다.
마지막에는 누워서 울고 있는 셋째를 보면서
나, 큰애,둘째가 어깨동무를 하고 울었다.
둘째와 셋째는 기억도 못 할 그때 일을
다섯살이었던 큰 애는 여섯살에 대구에서 전주로
이사와서 물었다.
"엄마, 우리 대구살때 왜 그렇게 울었어?"
니들이 우니까 그랬지
안그치니까
어떻게 해야 되는지 나도 모르니까
폭폭해서 울었지.
그런 말을 못해줬다.
우리 애들도 자식키워보면 알게 되겠지
그때 울었던 엄마를
그리고 나는 그때의 내가 문득
그
립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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