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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나는 오락실 집 딸이었다.

by 나경sam 2020.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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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 제삿날이다.

코로나도 그렇고, 오늘 내려 갔다가 저녁에 다시 올라와야 된다는 부담때문에

제사에 내려가기를 맘 접었다.

엄마는 아마 어제 쯤에 손이 가는 제사 음식은 이미 해 놓았을 것이고, 오늘 올케는 그냥 가서 상만 차리면 되게끔

아버지 제사 셋팅은 끝났을 것이다.

 

비정규직 일자리에, 그것도 늘 하는 일도 아닌, 사개월 일하는 게 하필이면 아버지 제사와 딱 맞춰서 하고 있어서 나도 못가고, 둘째는 화원을 하니까 가뜩이나 군산에 확진자가 확확 늘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못 내려가고, 셋째는 부산에 사니까 다녀 가기가 그래서 그렇고, 넷째는 대학원 시험이 하필이면 오늘이라 못 간다 그러니

아들 하나 있는 우리집 귀남이만 제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아주 많은 나이도 아닌데, 엄마는 점점 밤 잠이 없어져서 새벽 네시에 일어나던게 지금은 한 시에 눈이 떠져서

멀뚱멀뚱 앉아 있거나 일 없이 부엌을 서성거리다가 여섯시도 안되어서 아침밥을 드신다고 했다.

 

김장때만 해도 잠이 오지 않아 새벽 한시에 일어나서 밑 준비를 하고 있었더니

뒷집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우리집에서 소리도 나고 불도 켜져 있는 걸 보고는 새벽 두시에 건너오고

그러다보니 동네 아줌씨 할마씨들 여섯시도 안되어서 우리집에 모이는 바람에 김장이

오전 9시도 안되어서 끝났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엄마한테 전해듣고

내가 한마디했다.

 

"무슨 귀신들이여"

 

새벽에 김장하겠다고 남의 집에 하나 둘 쓰윽 나타나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부지런한 정도가 도를 지나쳐서 우리 엄마부터 옆집 뒷집 할마씨들 모두 엽기 할망구들 맞지 싶었다.

 

하나 있는 아들 이름 동성이를 붙여서 동성이 엄마로 시작되어서, 지금은 동성이의 아들 인오인 인오할매가 된

황경예 여사가 귀신처럼 버무린 김장김치는 아직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아버지 제사상에는 올라갈 것이다.

 

김장 무렵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한동안은 김장김치도 꼴 보기 싫더니만 지금은 김장김치도 잘 먹고

아버지 생각해도 눈물이 찔끔질끔 나지도 않고 우는 날 보다는 웃는 날이 더 많은 걸 보면

산 사람은 다 그렇게 살아간다는 말이 정답이다.

 

오히려 토요일날 남편이랑 애들이랑 함께 술을 마시면서 와인 한 병을 혼자서 달리고

술주정 하면서 혼자 울었으니

스무살 넘어서 해 보고, 처음 해 본 진상 짓에 낮뜨거워서 다음날 자식 새끼들 얼굴을 볼 수 없었는데

괜찮다고 다독거려주는 남편이나, 애들을 보니, 그것들 밥해주고 산 세월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제사가 다가오는 아버지 생각도 좀 났고, 까닭없이 우울해지는 요즘 내 마음이 그랬고

미친 갱년기인가, 술 마시고 진상 짓을 하다니

그래도 다음 날 오전에 남편이랑 사이좋게 손잡고 화서시장에 가서 칼국수로 해장을 하고 돌아온걸 보면

남편과도 잘 살고 있는 게 맞긴 한 것 같다.

 

2. 아버지는 오락실을 했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여름이면 그렇게 가지 못해 안달이 났던 풀장이 있었다.

입장료가 300원이었다.

대학생이 되었던 1987년 3월에 군산에서 전주 간 직행 버스 요금이 편도 500원이었는데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1981년에 수영장 입장료가 300원이었으니 비싸기도 했다.

그러니 엄마가 순순히 돈을 주면서 가라고 했을리가 없었고

특별히 놀거리가 없었던 그 시절, 우리 동네에 새로 생긴 풀장(공립 수영장)이었지만 우리는 풀장이라고 불렀다.

그 풀장에 한 번 가려면 엄마한테 백번쯤 말해야 여름에 한 번 갈 수 있었다.

큰이모 딸이 놀러 왔을 때 엄마가 큰 맘 먹고 나랑 바로 아래 여동생이랑 이모 딸, 세 명을 함께 보내준적이 있었는데

하여간 군산 애들은 다 우리 동네 풀장에 모였는지, 수영은 커녕 옆으로 움직일 공간도 없이 위 아래로 첨벙거리다가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워서 물 속에서 볼일도 다 보고 (나만 그랬을까 싶다)

수영장인지, 화장실인지 구별이 안 갈 풀장에서 등껍질이 다 벗져지게 놀다 왔었다.

군산에 유일하게 한 개 생긴 수영장이 하필이면 우리 동네에 생겨서 여름에 애들이 노는 게 우리집 옥상에서도 보이고

시끄럽게 노는 소리가 집에 까지 들려서 풀장은 우리 집 애들에게 늘 애증의 대상이 되었다.

 

가고 싶지만 쉽게 가지 못하는 수영장이라고 쓰고 우리는 풀장이라 읽었던 그 풀장

지금은 풀장을 메꿔서 동네 주차장이 된 지 오래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 땅을 보면 풀장이 생각나고, 엄마한테 조르던 어린 내가 생각난다.

동생들은 한 번 조르다 아니다 싶으면 말았지만 나는 집요하게 조르고 졸라 300원을 타내기도 했었다.

 

아버지가 그 풀장 앞에 오락실을 차렸다.

내가 고 3 가을에 아버지 본인이 원하지 않았던 퇴직이 이루어졌다.

큰 애가 고3이고, 막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고 아버지 나이는 오십도 안되었을때다.

내가 아버지 그 때 나이를 지나면서 생각해보니, 막막하기가 숨도 안쉬어졌을 것 같았다.

퇴직금으로 차린 게 오락실이었다.

 

그때까지 풀장은 주차장으로 메꿔지기 전이어서 애들은 바글바글했을 때였고

풀장 앞에 있다고 풀장 오락실이었던 우리 집은 애들이 오십원짜리를 들고서 미친놈처럼 드나들던 우리 동네

유일한 오락실이었다.

나도 오십원을 들고 다른 오락실에 드나들던 때였다.

다른 집에서는 너구리를 하다가 압정에 찔려 아래로 떨어지는 나의 소중한 너구리가 너무나 불쌍했는데

우리집에서 오십원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 너구리는 몇마리가 죽어 나가도 하나도 불쌍하지가 않았다.

 

갤러그도 마찬가지여서 위 아래 움직이지도 못하고 옆으로만 움직이던 답답한 갤러그도 두대가 합체를 해도

반갑지가 않았고 한대가 터져 나가도 아쉽지 않았다.

 

내 돈 오십원을 내고 할 때가 재미있는 거지, 우리집이 된 오락실에서 하는 건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제는 내가 알던 멋진 형사 아저씨가 아니라 동네 오락실 아저씨가 된 게 나는 서글펐던것같다.

동생들은 어렸고 주말이나 저녁때면 아버지 대신 내가 가게를 봤다.

 

갤러그를 죽지도 않고 끝까지 가는 놈들을 보면 뒷통수를 한 대 쳐주고 싶을 만큼 미웠고

매일 매일 오락실에 오는 놈들은 더 꼴 보기 싫었다.

매일 오는 아이들일수록 고수가 많은 법이라 걔네들은 어지간하면 죽지않고 끝판까지 갈때까지 가는 놈들이었으니까..

가게를 보다가 돈통에서 돈을 꺼내서 바로 앞 수퍼에 가서 카스테라 한 개를 사다가 아버지가 집에서 돌아오기 전에

목이 막혀라 카스테라를 정신없이 먹고 나면 벌써 아버지는 돌아와계셨다.

동전 바꿔줄려고 준비해놓은 돈 중에서 몇 개 꼬불쳐서 아무렇지도 않게 집으로 돌아오던 나는 참 못된 년이었던것같다.

 

풀장 오락실 사장님 우리 아버지는 잘되던 오락실을 왜 그만 두었을까

다 우리 때문이었을것같다.

 

그래도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 두고 했던 일들중에서 가장 수익을 창출해준것이 오락실 아니었었나 싶다.

이후 여러가지 일들을 하셨지만 다 쪼그라들었다.

없던 일이 되었고 아버지는 젊은데 확확 늙어 가는 게 내 눈에도 보였었다.

 

인생 마지막이다 싶을 때 그래도 우리 논은 있으니 내가 농사를 지어 봐야겠다고 선언하셨고

우리 엄마도 큰 엄마도 그런 아버지를 비웃었다.

농사일도 모르고, 삽자루도 쥘 줄 모르면서 농사를 짓는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쇼

자기 논이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를 양반이라고, 큰 엄마랑 엄마랑 아버지를 비웃는 소리를 하는 걸 내가 똑똑히 들었는데

아버지는 인생 마지막까지 농사를 지으셨다.

군사에서 임피로 자가용을 끌고 왔다 갔다 하면서 농사를 짓는 군산 할아버지

그것도 새로 뽑은 소나타 2.0을 끌고서 "자기 논이 어딘지도 모를거"라는 말을 무시한 체로

돌아가실 때까지 농사를 지으셨다.

아버지 일기에는 농사 일기도 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만오천킬로 밖에는 타지 않은 아버지 차를 내가 가지고 왔었다.

차를 하도 험하게 타셔서 새로 수리를 하느라 카센터에 가지고 갔었는데 차를 새로 손보고

깨끗이 닦아서 내주시면서 카센터 사장이 나한테 아버지가 뭐 하셨길래 차 안에는 흙이 많아요

닦아도 잘 안지워져서 하는 데 까지 하다가 그냥 뒀습니다 그랬다.

 

운전석 문에 코팅한 것 처럼 발라져 있는 게 우리 논의 흙이었다.

 

이제 돌아가신지 6년이다.

오락실에서 급하게 먹다 얹힌 카스테라처럼, 슬프지는 않으나 목이 꽉 막히는

월요일, 아버지와 함께

오락실 집 딸이었던 내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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