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부터 문장부호를 배우더니 이번주에는 문장을 생각해서 쓰는
1학년들에게는 아주 어려운 수준의 국어가 시작되었다.
요즘 엄마들 학구열로 보아 1학년 국어 활동 책에 한글의 자음 모음이 웬 말이냐 싶다가도
아이들이 자음을 쓸 때 순서 무시, 원래 모양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쓰는 걸 보고 있으면
국어 활동 책에 꼭 필요한 것이 한글 자음쓰기같기는 하다.
예를 들면 ㅁ을 쓸때도 그냥 그리는 수준이거나 ㄹ을 쓸 때도 각진 부분을 모두 무시하고 한 번에 휙 쓰기 때문에
한글의 아름다운 부분이 뭉개지는 것이다.
한글을 아름답다고 표현한 부분들은 자음자가 가지고 있는 각진 부분들을 살려서 썼을 때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자음자를 순서에 맞게, 정확하게 쓰는 걸 자르치는 것도 중요한 한글 교육이기는 하나
내가 잠시 보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그런 것들을 바래서는 무리다.
우선 읽을 수 있게 만들어서, 국어의 힘으로 수학을 풀 수 있게 만들어야 되니
한글의 아름다움일랑, 잠시 바이바이
영희와 철수가 등장하는 누런 갱지의 국어 교과서를 받아와서 엄마랑 한글 읽기 연습을 할 때
"어머니, 학교에 다녀왔습니다."를 제대로 읽지 못한다고 엄마한테 쥐어 박혔던 기억이 있다.
엄마가 읽어 주고 내가 따라 읽는 걸 했는데 엄마가 읽어 주면 자꾸 틀려서 결국 우리 엄니 황여사가
폭발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글을 읽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엄마가 읽어주는 대로 외워서 읽었을 뿐, 한글 해독이 안되었기 때문에 자꾸 틀렸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가 화끈하게 화를 내는 걸 보고 다급한 마음에 듣고,문장을 외워서 책을 보고 읽는 흉내를 냈기 때문에
우리 엄마는 화를 냈더니 저 애가 한글을 깨우쳤다. 라고 생각했을 터이고
한글은 학교에서 서서히 깨우쳤다.
1학년 때 채경순 선생님
나의 채경순 선생님은 우리들을 얼마나 예뻐했는지, 나의 인생에서 선생님은 그 분 한 분이시다.
선생님이 교실에서 등사기를 쭉쭉 밀어서 시험지를 만들어 내는 모습이 멋있었고 교실에 퍼지는 잉크냄새가 좋았었다.
1학년 때 첫 시험의 추억이 있다.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얘들아, 여기 괄호안에 자기 이름을 써야지 개똥이라고 쓰면 안된다고 누누히 일러 주셨건만
우리 반의 고은아가 개똥이라고 써 버렸다.
선생님이 나중에 우리 1학년 2반 아이들에게 고은아가 "개똥이라고 썼어요" 그러시면서 많이 웃으셨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그렇게 썼던 고은아가 얼마나 귀여웠을까, 1학년이 아니고서는 그럴수 없는 때이니
고은아가 귀여워서 그렇게 말씀하신거였는데 우리반의 은아는 선생님말씀을 듣고 울어 버렸고 우리들은 모두 웃었다.
개똥이 은아도 잘 살고 있겠지
우리들이 일제고사라고 불렀던 정기 시험에서 나는 별로 좋은 성적을 내는 아이가 아니었다.
공부는 서서히 나아져갔던 것 같다.
1학년 시험에서도 1번부터 4번까지의 객관식 문항에는 3번이나 4번 쯤에는 항상 잘 모르겠다라는
문장의 번호가 있었다.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문제를 풀다가 잘 모르겠어서 3번의 잘 모르겠다를 선택했는데 선생님은 빨간 색연필로 야박하게 사선을 그었고
나는 1학년 때부터 그게 왜 틀린 것인지 이상하기만 했다.
내가 잘 모르겠어서 잘 모르겠다고 했는데 그게 왜 틀린 건데, 그런 의문이 들었고 틀렸다고 할 거면 아예 그런 말을
써놓질 말든지 1학년 일제고사를 보고 나서 가장 잘한 아이에게 장원이라고 글자가 박혀 있는 노란색 이름표를
차고 다니게 했던 우리 학교에서 늘 장원을 차고 다녔던 동현이라는 남자애가 그렇게 꼬까웠다.
주먹만한 노란색 바탕에 검정색 궁서 흘림체로 장원이라는 두 글자만 커다랗게 박혀 있는 이름표였는데 내가
생각해봐도 그 이름표는 동현이라는 남자애 말고는 다른 사람에게 가지 않았었다.
2등에게는 흰 바탕에 우수라는 검정 글씨가 써 져 있는 이름표를 달아 줬는데 나는 저학년 때는 그 이름표를
한 번도 못 달아봤다.
"우수" 이름표는 아버지가 우리 학교의 선생님이었던 여자 아이 은미였다.
은미가 주로 우수 이름표를 찼었지만 그때의 나는 우수든 장원이든 하나도 부럽지 않았고 그 이름표를
단 아이들이 부럽다기 보다는 역 앞에서 슈퍼를 하는 의규네 집이 더 부러웠다.
이름이 남자 아이같지만 여자애다.
생각해보니 영악했던 아이였다.
의규가 집에서 잔돈을 가지고 와서 나한테 그걸 주면서 자기 숙제를 해달라고 그냥 니걸 그대로 베끼면 된다고 나한테 여러 번 시켰었는데, 내가 돈을 받고 한 두번 해 준것 같다.
의규는 돈도 많았고 늘 자기 집에서 먹을 걸 가지고 학교에 오는 아이여서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학교 앞 문방구에서 불량식품을 팔 때 의규네 집에서는 초코렛을 팔 기도 했는지 의규가 학교에 가지고 오는 과자들은
문구점하고는 쨉이 안되었다.
1학년 때 난생 처음 보는 쵸코렛과 십원에 자존심을 팔고 의규 숙제를 미끄럼틀에 앉아서 해주다가
장원과 우수 이름표에는 자존심이 안상했었는데, 이게 무슨 짓인가 라는 자각이 들어 집어 치웠다.
"앞으로 이런거 안할테니까 나한테 해달라고 하지마, 라든가 너 인생 이따위로 살지마"
라든가 그런 말은 하지 않았던것같다.
그냥 일학년 어린 마음에도 이런 것은 하면 안되는 몹시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는 걸 자각했던거다.
의규는 아마도 다른 아이에게 또 자기 숙제를 시켰을지도 모른다.
돈의 권력이라는 걸 이미 알게 된 된 일학년 짜리 여자애가 자기 손 아프게 숙제를 하는 일은 하지 않았을것같다.
의규는 형제 많은 집의 막내 딸이었고 슈퍼를 하는 의규네 집에는 우리들이 일년에 몇 번 손에 넣어 볼까 말까 했던
거금 십원짜리가 굴러 다닌다고 했으니 돈으로 숙제를 사는 일 따위, 심의규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숙제가 많아서, 친구집으로 숙제 하러 가는 게 그날 해야 되는 공부의 전부이던 시절에 살았으니
숙제를 하기 위해 동아전과나 표준전과 한 권만 있으면 아버지가 우리 학교 교사였던
은미가 본 다는 "교육자료"라는 교사용 지침서가 하나도 부럽지 않던 시절이었다.
숙제를 얼마나 전과에 의지했는지 정답이 길어서 전과의 답안에 "생략" 이라고 써 있는 걸
그대로 베끼기도 했었다.
전과의 소임을 다 하지 못했던 부실했던 정답이었다.
답안이 길어지면 어김없이 정답란에 생략이라고 써 있었고 나는 생략이라는 생소한 단어도 정답인줄 알고 그대로
베껴썼다.
선생님이 생략이 어떻게 정답이냐고 뭐라고 하면 전과에 그렇게 써 있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시절이었다.
고은아의 개똥이 사건이나 숙제에 생략이라고 쓰는 거나 그게 그거였다.
공부가 지지부진하여 결국 엄마가 일일공부 학습지를 시켰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잘난체하고 놀고 있던
동네 언니 집으로 수학 과외를 받으러 다니면서 공부가 조금씩 나아졌던것같다.
과외의 힘은 컸다.
4학년 때 아이들은 모두 풀지 못했던 기약분수를 가뿐히 풀면서 너는 어떻게 그걸 풀었냐는 친한 친구의 질문에
과외받아서 라고 대답하지 못했던 걸 보면 전과만 보고 공부하던 시절에 과외는 반칙이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하여간 과외 좀 시켰더니 단박에 공부가 나아지는 걸 본 엄마가 잘하는 애를 괜히 과외 시켰다고 생각했었는지
돈이 아까워서였는지 금방 그만 두게 했던 것 같다.
그럭저럭 공부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아졌던것 같고, 전 학년에서 풀지 못했던 수학 문제를 다음 학년이 되어서
저절로 터득하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면서 작년에는 왜 저 문제를 못 풀었었나 라는
심오한 깨달음을 경험하기도 했었다.
수학문제를 풀 수는 있는 데 문제를 읽지 못해서 못 푸는 아이들을 한 달째 보고 있다.
앉아서 떠드는 소리는 큰 데 문제 좀 읽어 보라고 하면 목소리가 확 줄어드니 외워서라고 읽게 끔
내가 여러번 읽어주고 따라 읽게 하고, 한사람씩 읽어보라고 시키기도 하니
문제 하나 푸는 데 오분 쯤 걸리나보다.
국어가 안되면 수학이 안된다는 규칙을 아이들에게서 보고 있으니 이때 아니면 언제 한글이 해독이 되겠나
답답해도 자꾸 반복할 수 밖에 없다.
3번 잘모르겠다를 당당하게 답이라고 적었던 나도 이만하면 잘 살고 있고
개똥이라고 적었던 은아도 잘 살고 있을 것 같고
돈주고 숙제를 시켰던 의규도 그 정도의 영악함이면 지금쯤 건물 한 채는 가지고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지금 나한테 오는 아이들도 나중에는 다들 잘 살 것같다.
"개" 로 시작하는 낱말을 만들라고 했더니 " 개놈"요 라고 대답했던 건 좀 웃겨서
마스크 안에서 큭큭대고 웃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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