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

아버지와 피아노

by 나경sam 2020. 6. 28.
728x90
반응형

 

비창2악장 - 집에 올 때마다 일단 비창 2악장을 치면서 시작한다.

우리집에 있는 물건 중에 가장 오래 된 게 피아노다.

맑은 소리 고운 소리 영창 피아노 영창

1985년도에 우리 집으로 왔다.

군산 친청에 있던 피아노가 내가 결혼하면서 전주 송천동으로 가지고 갔고 이후로 대전 선화동

대전 산내동 대구 읍내동 다시 전주 아중리로 그리고 제주도 애월 소길리로

강원도 춘천으로 수원으로 수원에서 사는 11년 동안에도 이사를 세 번했으니

우리 가족의 모든 역사와 함께 했다.

 

3년 전 쯤부터 집에서 잘 쓰지 않는 물건은 정리하거나 두 번 세 번 생각해서 버리거나 누굴 주거나했다.

지금 살고 있는 주택으로 이사오면서부터이다.

아파트에서는 앞 뒤 베란다에 숨겨놓고 쟁여놓을 수 있었던 물건들이 베란다 한 쪽 딸려 있지 않은 주택으로 이사를

오고 나니 여지없이 드러나서 처분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책에 대한 수집벽같은 것도 있었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책의 양도 만만치가 않았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 그렸던 그림이나 나름 추억이 될 만한 것들도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었으니

물건이란 쌓이면 쌓였지 줄어들지 않았고 마음먹고 정리하지 않는 한 사는 세월보다 물건이 더 많이 남을 지경이었다.

 

이름을 남기고 죽기는 커녕 쓰레기를 남기고 죽는 인생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태어나서 처음 입었던 배냇저고리 각각 한 벌씩 세 벌

내 자식이었다는 증거가 되는 배꼽 - 이건 세 개가 아니라 두개 뿐이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6.25 피난같았던

우리집 이사에 어디선가 분실했겠지만 나는 두개의 배꼽으로 돌려막기를 해서 아이들은 모두 자기 배꼽이 있는 줄 안다.

평생두고 보아도 의미가 있을 물건들이 아니면 모두 버리는 걸로 결심하고 이 집으로 이사오면서는 버렸다.

 

옥상에 창고가 하나 딸려 있어서 책은 거기다 뒀다지만 넘쳐나던 살림살이는 딱 필요한만큼만 두고

미니멀하게 살자

결심하고 mbc에서 방송되었던 미니멀리즘이라는 스페셜프로그램을 보면서 집을 치웠다.

프로그램 출연자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하나 버리면 나도 생각해서 하나를 버리고

집을 치우고 치워서 그나마 지금 사는 모양으로 각이 잡혔지만 사는 동안은 

어쩌면 끝나지 않을 소리없는 전쟁일지도 모른다.

 

얼마전에도 씽크대를 마음먹고 비워서 결국 한 칸을 깨끗하게 털어냈다.

상부장도 없는 우리집에 하부장도 한 칸은 비웠으니 살림살이가 단촐해지기는 했다.

냉장고도 300리터 조금 넘는 용량으로 살고 있으니 - 3년을 살아보니 지금 냉장고로도 충분하다.

 

결심에 결심을 하고 정리를 했지만 피아노는 어디로든 끌고 다녔다.

저 피아노로 승범이를 가르쳤고 은진이는 혼자서 네 살 때 작은별을 쳤고 수민이는 재즈소곡집을 치는 걸 좋아했었다.

 

아버지가 저 피아노를 사주셨을 때 나도 물론 좋았지만 본인이 더 좋아하셨다.

부모로서 뿌듯하고 기쁜 마음이 들었을것같다.

 

중고차 한대값에 버금가는 피아노였다면서 늘 자랑을 하셨다.

1987년도에 국립대학교 한학기 학비가 45만원쯤이었고 1985년에 사주신 피아노가 120만원정도였으니

대학교 세 학기 학비에 맞먹는 금액이었다.

 

그걸 내가 사줬다 라는 자랑하고싶은 마음이 있으셨던것같다.

 

이제는 아이들이 커서누구 하나 집에서 피아노를 치지 않고 자리는 차지하고 있어서 필요하다는 곳이 있으면

주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지만 우리 성가대 연습실에 막상 피아노가 필요하다고 할 때는

선뜻 "저요"하고 손을 들지 못했다.

 

이번생에 피아노를 처분하기는 글렀다.

 

우리 애들이 아이들을 낳거든 내가 저 피아노로 애들을 가르칠때까지 가지고 있는 걸로

 

은진이가 집에 올 때마다 쳐주는 비창 2악장이 듣기가 좋다.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니네 텃밭 꾸러미 언박싱  (0) 2020.07.23
니가 왜 거기서 나와 - 유수민-  (0) 2020.07.09
금요일 저녁은 빨래방이쥬  (0) 2020.06.20
나도 좋고 너희도 좋고  (0) 2020.06.10
수미니가 보낸 택배 언박싱  (0) 2020.06.0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