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

"빛나는 젊음"

by 나경sam 2019. 6. 28.
728x90
반응형



"빛나는 젊음"


딸이 이주동안 유럽으로 여행을 갔다.
한 학기동안 열심히 돈을 모아서 자기 힘으로 생애 첫 유럽 여행을 가는데 나는 십만원만 줬다.
혼자서 티켓도 끊고 (폴란드 국적기를 타고 바르샤바공항에서 환승을 해서 네덜란드로 날라갔다)

내가 준 십만원도 가기 전에 내가 뭐 사고 싶다고 하니까 엄마 그거 사는데 보태라고 삼만원을 도로 주고 갔으니

결국 나는 여행 가는 딸한테 칠만원만 준 셈이 된다.

돈이 얼마라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모든 일을 스스로 기획해서 당차게 떠난 딸이 새벽에 일어나서 가는 데도

내 눈에는 반짝반짝 거렸다.


자기 짐 20킬로에 악기까지 들고 갔으니 짐이 이만저만 많은게 아니라 악기라도 좀 두고 가라고 했더니
이제 악기와 자기의 운명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거라며 이주동안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아마 나중에 불 때 힘들거라고 들고 갔다.
실제로 들고가서 연습을 못 할 수도 있겠지만 두고 가기에는 마음이 불편한 것 같아서 극구 말리지도 못했다.

여행비를 칠만원만 줬을 때부터 이미 딸은 내 손을 떠났고
그 아이는 스물 두살의 멋진 청춘인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감출수없는 흑역사는 있었으니 바로 이거다.

딸이 아기였을 때부터 서너살때까지 쓰던 베개다.

제목을 붙이자면 "공포의 파란 베개"


아주 아기였을 때라서 저 베개를 파란 베개라고 발음도 못하고 "파란베에"라고 했을 무렵부터 저 베개는 딸의 애착 베개였었다.


만일 저걸 두고 어딜 갔다고 하면 우리 식구는 그날 밤에 집으로 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저 베개가 없으면 잠을 못 잤고 울고 떼를 쓰느라 주변 사람 모두에게 민원감이었으니

우리 식구들에게 저 파란 베개는 무서운 베개였었고 딸에게는 애착 베개였었다.


한 번은 시댁에 가면서 저 베개를 집에 두고 간 적이 있었다.

거의 시댁에 도착할 무렵에 우리는 저 파란 베개를 놓고 왔다는걸 알아차리게 되었고

이미 3분의 2이상을 왔지만 아무 말없이 돌아서 다시 베개를 가지러 갔었다.

(시댁으로 가는 것 보다 다시 우리집 가는 길이 훠월씬 더 멀었었다)

하지만 "문제의 파란 베애"를 무시하고 시댁으로 갔다가는 그 날 저녁 둘째는 아마 이랬을 것이다.


"좋은 말로 할 때 내 베개 내놔"


우는 아기 달래는 팁!!


그래서 우리는


성깔이 보통이 아니었던 둘째를 이겨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조용히 돌아가서 베개를 가지고 다시 시댁으로 갔었다.


큰 애도 셋 째도 없었던 애착 물건이 둘 째에게만 있었기 때문에 특이하긴 했지만 그걸 인정하고 받아줬었다.


네살때였었나 세살 때 였었나 둘째가 그때도 아주 어린 아기였었는데 그때 서울에서 친구 결혼식이 있어서

아이 셋을 남편한테 다 맡겨놓을 수가 인간적으로도 남편이 그럼 안됬다 싶길래 큰 애만 데리고 둘째와 셋째는 남편한테 맡겨놓고

전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갔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도 둘쨰는 자기를 떼놓고 간다면서 차 안에서부터 차 지붕을 뚫을 듯이 펄쩍펄쩍 뛰면서 집에서부터 전주역까지 함께 왔다가

남편이 나랑 큰 애를 내려주고 돌아가는 차안에서도 집까지 가면서 내내 방방 뛰면서

"차를 폭파시켜버리겠다"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고 했었다.


차안에서 남편이 둘째 붙들고 있는 동안 큰애만 데리고 차 에서 도망치듯이 내려서 전주역안으로 뛰어가면서

돌아가는 우리 차를 봤더니 둘째의 머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걸 봤었다.

승질을 있는대로 내면서 애기가 공중부양을 했던 것이다.


얼마전에 전주역 앞을 지나올 일이 있었는데 그때 생각이 나서 남편이랑 웃었었다.


하여간 본론으로 돌아가서 애착베개


한 번은 저 베개를 베고 자는 둘째가 어떻게 자나 하고 한 번 봤더니 자면서 한 쪽을 쓰다듬으면서 자는 걸 보게 되었다.

한 손으로 계속 쓰다듬었기 때문에 베개는 저렇게 너덜너덜 걸레가 되었지만

나는 아기들 물건을 정리하면서 저 베개 커버는 버릴 수가 없었다.


저 베개 커버때문에 내가 얼마나 애를 먹었었는지를 생각하면 버리기에도 스스로 약이 올랐었고

아기였을 때 그렇게도 애착이 있었던 베개였었기 때문에 그런 물건 하나 쯤은 컸을 때 보라고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렇게 걸레로도 쓸 수 없는 저 베개 커버가 우리 집에 남아 있게 되었고

어제 딸이 가고 나서 없는 틈에 방 정리를 대대적으로 할려고 옷장을 열었더니 서랍에 개어놓은 저 커버를 보게 되었다.


우리 속을 태운 건 베개 뿐이 아니다.

키도 다른 집 애들보다 조금씩 더 컸었고 속도 찼던 애였었는데 학교나 어디서 캠프를 가게 되면 도무지 하룻 밤 넘기는 일이

너무 힘든 아이였었다.


춘천에 살 때에는 가평으로 음악 캠프를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물론 초등학교 저학년이긴 했었지만

또래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에 잘 지낼 거라 믿고 보냈었다.

그런데 밤이 되자 선생님이 전화가 와서는 "은진이가 배가 너무 아프다고 해서 약도 주고 했는데 계속 아프다고 한다"고

너무나 곤란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었다.

일단 데려다 준다고 하셔서 밤 중에 집으로 귀환조치 된 딸은 집에 오자마자

배아픈게 나았다면서 아무렇지도 않아했었다.


하루라도 남의 집에 가서 자는게 다른 곳에 가서 지내는게 힘든 아이였던 것이다.


그래도 어쩔수없이 가야 되는 음악캠프같은게 있어서 가게 되면 결국 울고불고해서 우리가 다시 갈 수 밖에 없었고

갈 때는 멀쩡했다가 밤만 되면 울던 둘째는 그게 초등학교 3,4학년때까지는 계속 그랬었다.

아니 초등학교 5학년때까지도 그랬었던것 같다.


둘째에 비하면 큰 애와 셋 째는 어딜 가게 되면 처음부터 그 집 자식이었던 것 처럼 잘 지냈었고

둘째만 그렇게 남의 집 다른 환경에 적응을 하기 어려워했었다.


그러던 둘째가 혼자서 무겁게 짐을 끌고 혼자서 유럽을 가게 될 만큼 컸다.

물론 네덜란드부터는 함께 움직여줄 동행이 있으니 걱정은 덜 되지만

혼자서 경유하고 기차타고 가는 여정에 걱정이 되어서 나도 어젯 밤에는 도착했다는 카톡을 보고서야 잠을 잘 수가 있었다.


꾸미는 것을 좋아해서 화장도 프로급으로 하고 다니는 둘째지만 어제는

새벽에 가느라 화장도 하지 않고 어깨에는 악기 가방을 메고 무거운 가방을 끌고 가는 뒷 모습이 반짝거렸다는 걸 본인은

모를것이다.


멋진 스물 두 살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