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젊음"
내가 준 십만원도 가기 전에 내가 뭐 사고 싶다고 하니까 엄마 그거 사는데 보태라고 삼만원을 도로 주고 갔으니
결국 나는 여행 가는 딸한테 칠만원만 준 셈이 된다.
돈이 얼마라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모든 일을 스스로 기획해서 당차게 떠난 딸이 새벽에 일어나서 가는 데도
내 눈에는 반짝반짝 거렸다.
딸이 아기였을 때부터 서너살때까지 쓰던 베개다.
제목을 붙이자면 "공포의 파란 베개"
아주 아기였을 때라서 저 베개를 파란 베개라고 발음도 못하고 "파란베에"라고 했을 무렵부터 저 베개는 딸의 애착 베개였었다.
만일 저걸 두고 어딜 갔다고 하면 우리 식구는 그날 밤에 집으로 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저 베개가 없으면 잠을 못 잤고 울고 떼를 쓰느라 주변 사람 모두에게 민원감이었으니
우리 식구들에게 저 파란 베개는 무서운 베개였었고 딸에게는 애착 베개였었다.
한 번은 시댁에 가면서 저 베개를 집에 두고 간 적이 있었다.
거의 시댁에 도착할 무렵에 우리는 저 파란 베개를 놓고 왔다는걸 알아차리게 되었고
이미 3분의 2이상을 왔지만 아무 말없이 돌아서 다시 베개를 가지러 갔었다.
(시댁으로 가는 것 보다 다시 우리집 가는 길이 훠월씬 더 멀었었다)
하지만 "문제의 파란 베애"를 무시하고 시댁으로 갔다가는 그 날 저녁 둘째는 아마 이랬을 것이다.
"좋은 말로 할 때 내 베개 내놔"
성깔이 보통이 아니었던 둘째를 이겨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조용히 돌아가서 베개를 가지고 다시 시댁으로 갔었다.
큰 애도 셋 째도 없었던 애착 물건이 둘 째에게만 있었기 때문에 특이하긴 했지만 그걸 인정하고 받아줬었다.
네살때였었나 세살 때 였었나 둘째가 그때도 아주 어린 아기였었는데 그때 서울에서 친구 결혼식이 있어서
아이 셋을 남편한테 다 맡겨놓을 수가 인간적으로도 남편이 그럼 안됬다 싶길래 큰 애만 데리고 둘째와 셋째는 남편한테 맡겨놓고
전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갔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도 둘쨰는 자기를 떼놓고 간다면서 차 안에서부터 차 지붕을 뚫을 듯이 펄쩍펄쩍 뛰면서 집에서부터 전주역까지 함께 왔다가
남편이 나랑 큰 애를 내려주고 돌아가는 차안에서도 집까지 가면서 내내 방방 뛰면서
"차를 폭파시켜버리겠다"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고 했었다.
차안에서 남편이 둘째 붙들고 있는 동안 큰애만 데리고 차 에서 도망치듯이 내려서 전주역안으로 뛰어가면서
돌아가는 우리 차를 봤더니 둘째의 머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걸 봤었다.
승질을 있는대로 내면서 애기가 공중부양을 했던 것이다.
얼마전에 전주역 앞을 지나올 일이 있었는데 그때 생각이 나서 남편이랑 웃었었다.
하여간 본론으로 돌아가서 애착베개
한 번은 저 베개를 베고 자는 둘째가 어떻게 자나 하고 한 번 봤더니 자면서 한 쪽을 쓰다듬으면서 자는 걸 보게 되었다.
한 손으로 계속 쓰다듬었기 때문에 베개는 저렇게 너덜너덜 걸레가 되었지만
나는 아기들 물건을 정리하면서 저 베개 커버는 버릴 수가 없었다.
저 베개 커버때문에 내가 얼마나 애를 먹었었는지를 생각하면 버리기에도 스스로 약이 올랐었고
아기였을 때 그렇게도 애착이 있었던 베개였었기 때문에 그런 물건 하나 쯤은 컸을 때 보라고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렇게 걸레로도 쓸 수 없는 저 베개 커버가 우리 집에 남아 있게 되었고
어제 딸이 가고 나서 없는 틈에 방 정리를 대대적으로 할려고 옷장을 열었더니 서랍에 개어놓은 저 커버를 보게 되었다.
우리 속을 태운 건 베개 뿐이 아니다.
키도 다른 집 애들보다 조금씩 더 컸었고 속도 찼던 애였었는데 학교나 어디서 캠프를 가게 되면 도무지 하룻 밤 넘기는 일이
너무 힘든 아이였었다.
춘천에 살 때에는 가평으로 음악 캠프를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물론 초등학교 저학년이긴 했었지만
또래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에 잘 지낼 거라 믿고 보냈었다.
그런데 밤이 되자 선생님이 전화가 와서는 "은진이가 배가 너무 아프다고 해서 약도 주고 했는데 계속 아프다고 한다"고
너무나 곤란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었다.
일단 데려다 준다고 하셔서 밤 중에 집으로 귀환조치 된 딸은 집에 오자마자
배아픈게 나았다면서 아무렇지도 않아했었다.
하루라도 남의 집에 가서 자는게 다른 곳에 가서 지내는게 힘든 아이였던 것이다.
그래도 어쩔수없이 가야 되는 음악캠프같은게 있어서 가게 되면 결국 울고불고해서 우리가 다시 갈 수 밖에 없었고
갈 때는 멀쩡했다가 밤만 되면 울던 둘째는 그게 초등학교 3,4학년때까지는 계속 그랬었다.
아니 초등학교 5학년때까지도 그랬었던것 같다.
둘째에 비하면 큰 애와 셋 째는 어딜 가게 되면 처음부터 그 집 자식이었던 것 처럼 잘 지냈었고
둘째만 그렇게 남의 집 다른 환경에 적응을 하기 어려워했었다.
그러던 둘째가 혼자서 무겁게 짐을 끌고 혼자서 유럽을 가게 될 만큼 컸다.
물론 네덜란드부터는 함께 움직여줄 동행이 있으니 걱정은 덜 되지만
혼자서 경유하고 기차타고 가는 여정에 걱정이 되어서 나도 어젯 밤에는 도착했다는 카톡을 보고서야 잠을 잘 수가 있었다.
꾸미는 것을 좋아해서 화장도 프로급으로 하고 다니는 둘째지만 어제는
새벽에 가느라 화장도 하지 않고 어깨에는 악기 가방을 메고 무거운 가방을 끌고 가는 뒷 모습이 반짝거렸다는 걸 본인은
모를것이다.
멋진 스물 두 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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