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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아들과 바이올린"

by 나경sam 2019.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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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바이올린"


3월 19일 집에 온 이후로 하루라도 바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만나야 될 사람들도 많았고 해야 할 일들도 생각보다 많았다. 물론 그중에는 좀 미뤄둬도 괜찮은 일들도 있었지만

내가 나를 겪어본 결과 일을 잘 못 미뤄둔다는걸 알 수 있었다.

여유와 쉼의 미학이 없는 인간이 바로 나다.

특히 삼주 남짓의 시간동안 딸이 쓰는 "문제적 방" - 문제적 남자가 아니라 문제적 여자가 쓰는 "문제의 방"은

대대적인 청소와 함께 방의 구조를 내 마음대로 바꾸고 물건을 버린 결과

나중에는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악기의 부품까지 버린것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까지 받게 되었지만

돌아온 엄마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음껏 휘두른 곳이 바로 딸 방에서다.

그래도 아직도 너무 많은 옷과 화장품이 있는 방이지만 본인말로는

옷은 아직도 부족하고 화장품은 다 쓰는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일을 하고도 어제부터는 금요일에 한 번 나가게 된 중학교 학부모 평생교육 일본어 수업을 하러 갔다.

90분 수업 동안 잘 할수 있을 까 걱정으로 시작했지만 여태 살아 본 결과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일도 없고 걱정했던 만큼 현실로 나타나는 것도 없다는 것이 그동안 살면서 얻은 결과

살짝 긴장하면서 시작했지만 역시 일년동안 나름 지내다 온 경험치라는게 있어서

수업 진행도 그렇고 나름 만족스러웠다.

교장 선생님께서 함께 수업을 듣는 다는 게 부담스럽기 했지만 교장선생님도 배우는 사람이니

특별히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교장 선생님을 가르치는 특별한 사람이 바로 나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질 일이다.


딸이 가르치는 클라리넷 제자들 중에 서울대 교수님이 한 분 계시는데

우리 딸 말이 공부로 서울대 들어 온 애들은 서울대 학생이라고 해도 절대로 서울대 교수를 가르칠 수 없는데

자기는 서울대 교수를 가르치고 있으니 자기가 특별한 거라고 말을 하길래 웃었었는데

나도 바로 그 범주에 드는 특별한 강사가 된 것이다.

더구나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서는 가장 소질이 있는 사람이 바로 그 교수님이라고 해서

내가 교수님을 잘 가르쳐서 전공시켜라 그랬더니 자기도 그런 생각이 안드는건 아니라고 하면서 웃었다.


지난 주에는 "합창단"연습에도 나갔다.

2년 전부터 합창단에 나가서 활동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입시생 뒷바라지와 내가 하는 일의 시간이 맞지 않아

접어 뒀다가 이제 시작했다.

"매홀 여성 합창단"

매주 목요일 10시부터 12시까지 연습이라 지난주부터 나가서 시작했다.

생각한 일을 바로 실천에 옮기는게 장점이자 단점이라서 나는 생각하면 벌써 그 일을 하고 있을 때가 많은데

함창단도 그런 일들중에 하나

어쨌든 이제 시작했으니 한 번은 드레스 입고 노래불러야 인생의 버킷 리스트 하나 체크표시 되는거다.


금요일 수업 마치고 강릉시향 정기 연주회보러 남편과 강릉행

승범이가 객원으로 참여하는 강릉시립교향악단의 정기 연주회

악보를 받았을 때부터 마음이 설레었던 시향 정기 연주회였다.




전주에서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7월에 제주도로 이사를 들어갔는데

성격이 무척 내성적이었던 아들은 전학에 대해서 적응을 하는것을 아주 힘들어 했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다른 사람과 얼굴을 마주 보게 되는 경우 쑥스러워하면서 얼굴을 옆으로 휙 돌리는 아이가 바로 우리 애였었다.

겁도 많아서 미용실에 가서 바리깡으로 머리를 깍을 때면 윙하는 바라깡소리에 자지러지게 울어대서

머리 깍는 일도 아주 힘이 드는 손이 많이 가던 아기였었다.

백일이 되기 전까지 꼬박꼬박 한시간 반에 한 번씩 깨서 분유먹고 잠투정하느라 큰 애키우던 시절

내 몸무게는 인생 몸무게를 경신했고 다시는 그런 몸무게를 못가져봤다.

몸무게 앞자리가 4자가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 것도 큰 애덕분이라면 덕분이다.

원체 낯가림도 심해서 가족이나 친한 친구외에는 말도 잘 섞지 않던 아이여서 어느날 우리애가 여섯 살 때

자기 친구 엄마를 보고 "아줌마 안녕하세요"하던 모습을 봤을 때 나는 나름 충격을 받았었다.

우리 애가 다른 사람을 보고 아줌마소리도 할 줄 아는구나 하는 놀라움이었다.

뭐 어쨌든 그런 애였으니 전학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스러운 마음이 지금도 있다.


전학을 간 장전조등학교는 비행기가 이륙을 위해 몸을 낮추는 유수암쪽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였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놀던 아이들이 이륙을 위해 고도를 낮추는 비행기의 허연 배를 훤히 들려다 볼수 있을 만큼

비행기가 낮게 날으는 곳이었다.

학교가 예뻐서 2002년 이전에 구몬학습지 광고에도 나왔었던 초등학교였지만 학교는 그림처럼 예뻤어도 우리 애는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늘 징징거렸고 학교가기 싫다고 했었는데 가장 컸던 원인은 같은 반 친구였던 "노아"때문이라는걸 나중에 알았다.

7살에 들어가서 키도 작았고 전학생이었던 우리 애를 키도 컸고 힘이 셋던 노아가 잠시 괴롭혔던거다.

2학년 때까지 남들과 제대로 싸워본적도 없고 욕 한마디 할 줄 몰랐던 애라서 힘들었을 것이다.

나중에 큰 애의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서 남편과 어린 두 동생들 줄줄이 데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노아를 만나서

 잘 타이르고 부탁하고 어찌어찌 해결을 봤지만 (우리 식구 숫자에 밀렸을 노아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특히 둘째의 성깔있는 얼굴을 봤을테니 아마 우리 가족의 타이름과 부탁에서 밀린게 아니라 둘쨰의 얼굴을 보고 물러섰을수도 있다.

그래서 그 무렵 시작하게 된 것이 바이올린이었다.

애월 납읍에 사시는 제주 시립교향악단 선생님 댁으로 일주일에 한 번 승범이를 태우고 다녔다.

산동네에 있는 관사라서 기본적으로 애들이 다니는 미술학원도 관사의 아이들이 적어도 몇 이상은

다녀야 차가 올라와주었고 어린이집도 마찬가지여서 세 네명은 되어야 어디든 협상이 가능했다.

그때 관사의 아줌마들의 관심사는 몇 명이 모아져야 어린이집 차가 올라와 주는지 바로 그런거였고

치킨을 몇 마리 이상 시켜야 배달이 되는지 그런것들이었지만

내가 사는 동안은 치킨 배달같은 프랑스 시민혁명에 버금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서

치킨을 아주 많이 시켰던 2004년 크리스마스때 애월에 있는 치킨 집 아저씨와 내가 협상을 해서

산중턱에서 만나 치킨을 받아서 내가 가지고 올라왔던 것이 가장 큰 성과라면 성과인데 그때 눈이 엄청 내려서

내가 눈길을 그것도 산길을 덜덜 떨면서 운전하고 내려갔었던 생각이 난다.


험한 산길이었던 애월 소길리의 숲속길을 샛길로 운전하고 다니면 납읍이었다.

길이 험해서 운전하고 다니면서 산 속에서 차가 펑크 난 적도 있어서 산 속에서 써비스 부르고 아들이랑 기다린적도 있었고

귤 밭 과수원의 귤 나무 가지를 스치듯 운전하고 가면 마을이 환하게 나타나던 애월 납읍 선생님 댁


인테리어 잡지에도 소개가 되었던 집이었는데 초가집이 안 채였고 바깥채에 집이 또 한채 있는

전형적인 제주도 집의 형태였다.

제주도는 담 안에 집이 그렇게 두 채가 있다.

부모랑 함께 살아도 각자 사는 공간을 달리 하고 밥도 따로 먹는다.

쿨하기가 외국 부럽지 않은곳이 제주도다. 선생님 댁도 그런 집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달리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던 전학생이 처음 배우게 된 악기가 바이올린이었고

본인 입으로 그걸 그만 하고 싶다고 특별히 말한적이 없었기 때문에 계속하게 되고 물론 그동안 좌절도 많았지만

전공도 하게 되었고 4학년이 되어서 어제와 같은 무대에도 선 것이다.


처음 바이올린을 배워서 오케스트라 활동을 할 때도 대견하더니 아직 객원이긴 하지만

시립교향악단의 객원 연주자라니 우리 아이도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생스러웠을까 싶기도 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어서 걱정이 많이 되기는 하지만 걱정한다고 취직이 되는것도 아니고

저렇게 활동하다 보면 언젠가는 정식단원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동네 오케스트라같은곳에서 활동하면서 무대에서 연주하던 때 생각해보면

지금처럼 객원이긴 하지만 시향에서 연주하고 있는게 꿈같은 일이기도 하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애월 납읍 산길을 그렇게 열심히 운전하고 다녔던 보람을 어제 알게 되었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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