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는 도무지 현실감이라고는 1도 없다.
특히 주부가 집을 떠나 있다는 것은 더욱 그러해서
평소에 하던 집안일이며 걱정거리들이며 신경쓰이게 하는 사람들도 내 앞에 없으니
하루를 온전히 나한테만 집중할 수 있어서 시간은 평소와 다르게 흘러간다.
밤새 내린 제주도 눈이 그칠줄 모르고 오전 내내 열심히 내렸다.
종아리까지 빠지는 저 눈을 밟고 렌트카를 찾으러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제주 시내로 내려왔더니
해발 400고지 관사 동네와는 다르게 시내는 차들이 씽씽까지는 아니어도 그냥저냥 다닐만 했고
저 윗동네에 눈이 종아리까지 빠지게 쌓여 있어요 라고 내가 말을 했다면
양치기 아줌마되기 딱 이었다.
셋째가 어린이집 다닐 때 원장님한테 우리 동네에는 눈이 이만큼 있어요 라고 두 팔을 벌려 자랑을
했다고 했었는데 400고지는 눈도 잘 안녹고
동네 아저씨들 술도 잘 안취해서 제주도 관사 아저씨들은 모여서 술도 잘 마셨었다.
관사 주변이 온통 풀이라서 여름에 잠깐만 지나면 풀이 죽자고 덤벼서
관사의 직원들은 여름이면 벌초때나 쓰던 예초기를 들고 여기저기서 윙윙 거리면서 풀을 깎았다.
안그러면 뱀이 나오니까 정기적으로 풀을 깍아줘야 덜 위험해서 풀깎기는 관사의 월례 행사였다.
풀깍고 마시고
자기들끼리 테니스치고 마시고
어느집에서 친정에서 맜있는거 부쳐왔다고 안주가 좋으니 가서 마시고
회식하러 나가서 또 마시고
얼마나 술들을 마셔댔으면
나는 제주도 살 때 남편이 자주 가던 술집 이름을 지금도 기억한다.
"마중" 과 "박서방치킨"
그렇게 술들을 마셔도 해발 400고지의 공기는 사람이 살기에 최적화된 공기라나 어쩐다나 하면서
그대로 숙취가 깬다는 과학적 근거 1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고
술을 많이 마신 동네
라동 앞에서 아이들은 축구도 하고 자전거도 탔고
우리 윗집 용걸이는 라동 앞에서 날씨 예보도 재미있게 흉내를 잘내서
용걸이가 일기예보를 하면 나는 쭈그리고 앉아서 웃으면서 보곤 했었는데
지금은 조용히 눈만 쌓여있는 관사 앞 마당
렌트카 타고 오일장가서 갈치도 사고
졸업했던 병설 유치원가서 그냥 쳐다도 보고
광령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을 졸업할 때 둘째가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읽어서
내가 저 애 엄마예요라고 말하고 싶은 걸 얼마나 참았었는지의 그때 그 마음과
졸업 사진이 똘망똘망하기가 하버드 대학교 졸업사진같다면서 유치원 선생님과 함께 웃었던게 십 몇년전의
일이 아니라 손을 뻗으면 바로 앞에 있는 것 처럼 잡힐 것 같은데
잡을수가 없다.
학교 앞에는 새마을 금고가 있어서
초등학교 건너편에는 새마을금고가 있다라는 자기만의 공식이 있었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춘천으로 이사를 간 후에 입학했던 초등학교의 건너편에 새마을금고가 없던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단다.
은행을 새마을금고로 배운 시골쥐였던 우리 애들
큰 애가 다녔던 장전리의 장전 초등학교
운동회를 하던 어느 해 학부모와 아이들이 한팀으로 큰 공굴리기를 했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술에 취하셔서 공을 엉뚱한 방향으로 쳐내는 바람에 운동회를 보면서
나는 또 얼마나 웃었던가.
장전 초등학교 앞에 장전 보건소가 있어서 아이들 예방 접종은 보건소에서 맞췄었는데
보건소는 없어지고 그 자리쯤에는 조그만 카페가 있었다.
"하소로" 카페
소길리 어디쯤에 이효리도 살지만 장필순도 산다고 하던데 장필순이 가끔 들리는 동네 카페라고 했다.
오늘은 주인이 쉬는 날이라고 아쉽게 커피는 못마시고
내맘대로 제주도 짠내투어 여행이다보니
내리고 싶은 데서 내리고 들어가고 싶은곳에 들어가고 아님 말고
가이드가 엄마 딸은 손님
세상 편하다.
가다가 또 병설 유치원 다니기 전에 다녔던 어린이집에 잠시 들러 기웃기웃
막 저러고 있는데 어린이집 선생님이 나오셔서 인사를 드리고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계신 원장님을 만나 커피도 마시고
우리 애들 어렸을 때 찍어 주신 사진도 카톡으로 받고
어린이집이 곧 20주년이 된다고 말씀하셔서 "홈커밍데이" 하라고 말씀드렸다.
대학교나 고등학교만 "홈커밍데이"하지 말고 유치원이나 어린이집도 그런거하면 재미있겠지싶다.
신기한게 2012년 겨울에 왔을 때 가족이 전부 어린이집에 들렸을 때도 원장님이
계셔서 깜짝 놀랐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6년이 지났는데도
시간은 육개월 정도만 흐른것처럼 상황이 변함이 없었다.
깜짝 놀랄만큼 반가워하시면서 우리 가족을 금방 알아보시고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을 하셔서
잠깐 사이에 별별 이야기를 다하고 놀이터 앞에서 원장님과 추억 사진 한장 찍고 헤어졌는데
오늘 하루 일정중에서 가장 뿌듯했던 시간이다.
서귀포로 넘어가서 오설록
녹차덕후는 아니지만 오설록 녹차 롤과 녹차 아이스크림은 비싼만큼 맛은 있더라는
짠내투어가 컨셉인 관계로 한개씩만 시켜서 맛만 보고
서귀포 이중섭 미술관에 가서 이중섭 그림 감상하고 서귀포 앞바다 문섬과 섶섬
저녁은 오분작뚝배기가 유명한" 진주식당"에 가서 오분작 뚝배기로 해결하고
다시 관사로
여행도 기운 있을 때 다녀야지
은근 추운 날 돌아다녔더니 목도 잠기도 기침도 나와 피곤함의 지수를 몸이 알아차리는 것같다.
집떠나올 때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긴 것같더니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현실감없이 빠르기만 하다.
하루는 서쪽으로 돌았으니 내일은 동쪽으로 쭉 돌아야지
여행이 별건가 그냥 가고 싶은데로 나하고 싶은데로 그렇게 갈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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