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 생신이 음력 6월 17일
폭염안에 들어 있는 어머니의 생신은 아이들 어렸을 때 같으면 시댁에서 1박 2일동안
삼시세끼 해먹으면서 먹고, 마시고의 며느리 스트레스 대잔치였겠지만
그랬던 우리 시댁도 언젠가부터 꽤 오래전부터 밖에서 밥먹고, 밖에서 커피도 마시고
집에 잠깐 들러서 과일과 술 한잔 간단하게 마시고 끝나는
아주 세련된 형태로 바뀌었다.
이것을 나는 기적이라고 부른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 "기적"이지 뭐시 기적이여
그리고 얼마 안됐지만 시댁에 갈 때마다 남편이 나한테 주는 소정의 금일봉 제도도 생겼고
결혼 생활 이십 칠년 동안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이번 생신에는 막내까지 데리고 우리 가족은 모두 갔다.
언젠가부터 아이들은 데리고 다니지 않는 시어른들의 생신이 되어 버렸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다니지 않게 되면서 아들들과 며느리들만 참석하는 생신이 돼버렸는데
이번에는 우리 아이들이 모두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주머니를 털어드리고
즐거운 생신이었다.
키울 때는 등골이 빠질 것 같더니
이렇게 크고 나니 어딜 데리고 다녀도 셋이라 둘보다는 더 든든한 맛도 있고
이번 생에 가장 잘한 일이 저것들 셋 낳은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어렸을 때는 어디 한 번 갈려면 이삿짐같았던 보따리부터 차 안에서 난리 울고 싸고 토하던
트리플 난리를 치르고서야 목적지에 도착하던 쓰라린 기억들이 너무 많아
남편도 나도 어디 한 번 갈려면 각오를 단단히 하고 출발했어야 했다.
승질 까칠했던 둘째는 애착베개가 아니면 잠을 안잤기 때문에
베개를 빼놓고 출발해서 시댁과 우리집의 딱 중간 쯤 갔을 때
베개를 두고 온 게 생각나서 우리 부부는 두말없이 집으로 돌아가서 베개를 가질러 돌아갔던 적도 있었다.
남들이 들으면 "뭘 그렇게까지" 그럴지 모르지만 우리만 아는 우리 아이들의 특징이 있기 때문에
느슨하게 뜻 받아주면서 키운 것 같다.
큰 애도 까칠하기가 한 몫 했었기 때문에 남편이 안고 내려 놓지를 못해서
시어머니는 그만 좀 안고 있으라고 짜증을 내셨을정도로 다들 생긴대로 자기 성질 부리고 살았던 아이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어머니의 그 말씀은 "며느리, 니가 좀 안고 우리 아들은 좀 쉬게 해줘라" 는 말씀이었을것 같다.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드리는데 시어머님이 우셨다.
"내가 살아 있으니까 이렇게 너희들이 모여서 좋구나" 하시면서 우시는데
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언젠가부터 시어머머니가 그렇게 우신다.
많이 늙으신거다.
똑바로 서서 반듯하게 걷지도 못하실만큼 몸의 균형이 틀어졌는데도
우리들 온다고 오이 김치, 청국장 만들어서 챙겨주시고
조기 넣고 고사리 넣고 자식들 생각해서 한 솥 끓여 놓은 게 어머니 마음이 보였다.
우리들이 드린 용돈은 아이들이 그대로 받아 왔지만
그래도 아이들 데리고 간 건 잘했다 싶었다.
군산 찍고 정신없이 하루에 두 집 투어를 하고 올라와서
어머니가 주신 청국장에 우리 엄마가 준 바지락 국물과 바지락을 넣고 김장 김치 쫑쫑 썰어넣고
청양고추 넣고 두부 썰어넣고 청국장을 끓여서 먹고 토요일 저녁을 마무리
힘들었지만 잘한 일이다 싶은 하루를 보내고
일요일은 옥상에서 머리가 찰랑찰랑 기른 부추를 따다가 바지락 국물에 칼국수를 끓여서 한 솥
우리 엄마가 준 열무김치 시어머니가 담궈 주신 햇김치
땀 뻘뻘 칼국수 한 그릇을 먹고 주말이 갔고, 막내도 구미로 돌아갔다.
한여름에 태어 난 우리 어머니도 힘들었을테고, 우리들도 힘들었던 어머니의 생신이지만
무사히 보내고 손가락 하나 접은 행사
앞으로 일주일은 올림픽 보면서 시원하게 보내기
그리고 다시 일하러 나가기
쉬엄쉬엄, 그렇게 살자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갤럭시J4+ 마지막 기록 (0) | 2021.08.25 |
---|---|
금요일은 택배를 싣고 (0) | 2021.08.06 |
가지,오이 장아찌 (0) | 2021.07.20 |
가을 우체국 앞에서 (0) | 2021.07.12 |
이 정도는 입어줘야 패션이지 (0) | 2021.07.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