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씨 아줌마 취업 분투기"
2010년이었나 그 무렵에 네이버 블로그에서 봤던 "산골 소녀 투쟁기"를 하루도 뺴놓지 않고 보던 때가 있었다.
인간극장에도 나왔던 아정씨 부부가 강원도 산속에서 자연과 어울려 상생하는 일상을 블로그로 기록해둔 블로그였었는데
산속에 눈이 무릎까지 허리까지 빠지게 와서 고립된 생활을 하는 걸 보는 것도
그 집 강아지 아니 개다. 개 이름이 산이였었다.
산이가 새끼를 낳는 것도 블로그였었지만 남의 집 개가 새끼낳을 때 안스러워하다가 강아지들을 보면서 예뻐하다가
그 집 아정씨네 부부가 집을 짓는 대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집짓기가 얼마나 진행되는지 공사감독처럼 체크도 하다가
본인들은 너무 힘든 순간들도 그걸 글로 보는 나는
미안하지만 재미있게 보다가 드디어 아정 아줌마 블로그를 그만 두고 절필이 되었을 때 재미있게 보던 남의 일기를
더이상 볼 수 없는 약간의 상실감마저 들어 이미 글이 끊긴지 오래 인 산골소녀투쟁기를 간혹 들춰보았었으나 역시나 절필
다시 블로글르 쓰시라고 아정씨네 산골로 찾아 갈 뻔 했었다.
혹시 나도 나중에 블로그하다가 그만 두면 화서동 우리집에 찾아 올 사람들이 생길려나
아마 남편에게 항의를 먼저 받을 것 같다.
원고료를 주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나한테 블로그를 쓰라고 아니 써달라고 재촉을 하는지 이유를 알 수없는 남편이다.
오죽 산 속 생활이 힘들었으면 산골소녀 투쟁기라고 제목을 지었을 까
소길리 산 속에서 잠시 살아본적이 있던 우리 가족들의 생활을 돌이켜봐도 도시를 떠난 현대인들은 삶 자체가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과자 한 봉지가 소중했고 전기가 소중했었고 물이 정말 소중했었던 해발 400고지에서의 생활을 돌이켜보면 그 또한 지나갔으나
내 삶에서도 산골아줌마 투쟁기가 분명히 있었다.
그때 한 번의 투쟁기가 있었고 2019년 3월 20일부터 이번 주까지도 취업을 향한 고씨 아줌마의 투쟁기가 있었다.
한국 나이로 오십이 넘으면 재취업이나 아르바이트가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뼈속까지 실감했다.
3월달에 중학교의 학부모 일본어 강좌를 나가게 되었지만 교육청 예산만큼 진행하는 수업이라서 2학기에 네 번이면 종강이었고
비정규직으로 또 어딘가의 채용 공고를 눈이 시리게 보다가 이력서를 내고 또 내고 해야 되는 과정이 있다는 건
재미가 없어도 1도 없다.
그래 제대로 취업을 하자 마음을 먹고 워크넷에 등록을 하고 4월부터 거의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경기도 교육청 - 워크넷 - 나라일터 - 알바몬 - 알바천국 - 수원시청 채용 공고까지 열심히 들여다보고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있는지
강가에서 사금 채굴업자들이 망에다 모래 걸러서 사금 찾아내 듯이 나도 그렇게 열심히 뒤지고 또 뒤져서
뭐 그동안 이력서 내고 면접을 본 곳도 있었고
이력서를 내고 자소서를 자서전만큼 드라마틱하게 써서 냈으나 전형도 통과하지 못 한 곳도 있었다.
제일 처음에 면접보고 떨어진 곳은 호텔 메이드였다.
웬 메이드냐고 남편이 말렸지만 면접보러 오라고 하는게 어디냐며 유튜브를 찾아서 호텔 메이드라는 직종의 어려움이나 하는 역할에 대해서
찾아보고 나름 준비를 해서 갔으나 ( 일단 정년이 보장되었고 급여도 괜찮았고 무엇보다 용역회사가 아니라 호텔 직영이라는게 마음에 들었으나)
면접관으로 나온 호텔 직원과 메이드 팀장
이 일이 얼마나 힘든줄 알고 지원하셨냐며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힘든 일이다라는 것을 몇 번이나 강조를 하면서
이건 마치 면접 보러 온 사람에게 알아서 먹고 떨어지라는 식으로 면접을 진행해서
이럴거면 뭐하러 면접보러 오라고 했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날 면접을 보고 가윤이네 윤 아트홀에 가서 낮 맥주를 두 병이나 마시고 알딸딸해져서 집에 왔었다.
매일 매일 이십대 취준생의 마음으로 취업 공고를 들여다봐도 사실 내가 특별한 경력의 소유자가 아니었고
우리나라는 알바만 하더라도 오십이면 사망선고에 가까운 허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교토 히가시야마 산죠 훼미리마트에는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가 레지를 보고 있고 헤이안진구 앞 편의점에는
더 늙은 할머니가 알바를 하고 있는 마당에
우리나라는 아직 허리가 꼿꼿한 나도 어디가서 일 할데가 이렇게 없구나 - N0 JAPAN을 외치고 있지만 취업에 있어서만큼은 NO KOREA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에 누가보면 내 블로그 폐지 운동 일어날만큼 무서운 소리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현실이 진짜 그렇다.
내가 살고 있는 구역 화서동 파리바게트 빵집만 하더라도 빵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구하는데 나이가 26세란다.
사실 26세면 정규직으로 취업을 해서 나가야 되는 나이이지 동네 빵집에서 알바할 나이가 아닌데도
알바생의 나이가 정해져있다니 이게 무슨 개 풀뜯어먹는 개소리인가 싶기도 하지만 현실이 진짜 그랬다.
두번째 이력서를 낸 곳은 YWCA 아이러브맘 카페 실무자
여기는 공고를 보자마자 바로 내가 적임자아닌가 싶을 정도로 조건이 나랑 딱 맞는 곳이었다.
보육교사 자격증에 실무 경험이 있으니 이보다 더 나랑 어울리는 곳이 없다 싶었는데 문제는 자소서가 있었다.
그렇지만 뭐 자소서하면 바로 나 아니겠냐고요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글빨의 소유자 그게 바로 나야 - 기다려 다 죽었어
자소서를 증맬증맬 감성 삘 100 진실성 100 일하고자 하는 마음 100으로 만들어서 쓰다보니 세 장이 되었다.
자소서라 쓰고 자서전이라 읽을 만큼 썼으나
떨어졌다. 면접에도 못 가보고 떨어진 이 수치심과 기분나쁨은 오로지 나의 몫
하지만 수많은 20대와 30대의 취준생을 생각하면 오십 아줌마의 기분 나쁨과 죄절은 명함도 내밀 수 없다는 게 지금의 현실일테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소피아 언니랑 주고받은 카톡에서 무척 오랫만에 본 푸쉬킨의 시 한구절에서 위로를 받는다.
때로는 사람보다 한줄의 글이 사람을 더 위로한다.어떤 때는 커피 한 잔이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나의 장점중 최대의 장점은 무엇이냐면 바로 바로 털고 없애는 단순함과 잘될거라고 믿는 근거없는 자신감이다.
세 번째는 바른두레생협의 활동가 모집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보냈다.
네시간이기는 하지만 여러번의 경험으로 내가 이력서를 낼 수 있는 곳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찬밥 더운 밥 진밥 가릴 처지가 아니고 8시간 4시간 가리고 싶은 의지와 마음의 분별심은 사라진지 오래
하지만 생협에 대한 믿음같은게 있었으니 일단 해보자
이력서를 또 정성스럽게 써서 메일로 보냈더니
면접을 보러 오라는 기쁜 소식
바로 직전의 YWCA에서 면접도 못 본 수치심이 아직 생생해서 면접만 보러 오라고 해도 너무나 감사한 이 마음
본점인 안양까지 가서 그날 면접 군의 첫 시간대에 면접을 봤다.
상무님과 인사 담당자 두 분이 들어 온 면접에서 최대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을 들이댄 결과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게 상무님 책상위에 이력서가 쓱 눈으로 스캔해봐도 일곱개가 있었다.
그 말은 바로 그날 면접자가 일곱 명이라는 이야기
그렇다면 이력서를 낸 사람은 사실 더 많다는 이야기 아니겠어
면접에서 승부수를 띄워야지 칼을 뽑고
상무님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일본의 카나가와 생협과의 교류로 인해 10월에 일본에서 생협 관계자들이 오는데 혹시 통역이 가능하냐고 질문에 있었는데
그럼 나의 대답은 바로
네 표준말도 가능하고 칸사이 사투리도 통역이 가능합니다.
뭐 그렇게 대답을 하다보니 내 바로 뒤의 아줌마하고 시간이 겹쳐지는 불상사가 발생했지만 내가 훨씬 많은 시간과 질문을 받고
그날 오후에 바로 합격 전화를 받고 곧바로 다음 날부터 출근
하지만 천천점 활동가 모집을 보고 이력서를 냈으나 근무지는 안양이 되었다.
상무님 말씀이 안양 본점에서 필요한 인재라는 생각이 들어서 본점에서 근무하면서 일을 더 많이 배우시고 시간을 늘려가는게 좋을 것같다고
네 시간이기는 하지만 정규직이라는 잇점이 있고 시간을 점점 늘려가면서 일할 수 있고 나중에는 지점장이 될 수도 있고 얼마든지
승진의 기회가 있다는 점
무엇보다 나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어쩜 나를 키운 8할은 호기심이 아니었었나 싶다.
내 블로그의 인기글이라는 표현은 좀 그렇지만 블로그 초기에 썼던 글 중에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는 글이 아직도
사람들이 읽는지 읽어 본 목록에 뜨는데 정정해야겠다.
진정 나를 키운 8할은 호기심이었다.
그렇게 일한 바른두레 생협에서의 일이 오늘로 벌써 3일째의 출근이다.
내가 하도 정규직 정규직 하다보니 우리 엄니 황여사 취직했다는 이야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정규직"이냐고 묻고 오케이
이로써 나의 취업 분투기는 일단락지어졌다.
돈 페페도 사람이 구해지지 않아서 오전 근무로 생협 근무하고 사당으로 넘어가서 저녁 알바까지 병행하는 지난 주는
고난의 한 주였었지만
나 취직한 여자야
아침에 민트색 자전거를 열심히 타고 화서역으로 달리는 아줌마를 보면 그게 바로 나다
저녁 12시에 병무청에서 자전거를 타고 열심히 집으로 돌아가는 아줌마를 보게 되면 그게 바로 나다.
바른두레 생협에 뼈를 묻겠다는 심정으로
이상은 52세에 신입이 된 아줌마 취업 투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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