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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산너머산"

by 나경sam 2018.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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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너머산"


자식이 그렇다.

"산너머산"

힘들게 입시마치고 띵까띵까 휘파람 불며 노는 놈이 있고

4학년에 올라가는데 앞이 안보이는 녀석도 있고

한 놈은 제주도에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삼시세끼 밥먹고 뛰는 놈이 있고

아 어쩌란말인가 정말


큰아이가 4학년에 올라가니 마음이 참 착찹하다.

내가 보기에는 저렇게하고 어디 들어가나 싶을 정도로 저하고 싶은데로 다 하고 다니는 것같으니

답답하고

더구나 남자아이다보니 취직이 우선인데

공부하는 아이처럼 어딘가 취직 시험을 보는것도 아니고

교향악단에 들어가는것이 가장 큰 취업인데

어디 말이 쉽지

음대 들어가는것보다 취직은 더 어렵다.


음대는 그나마 또래또래 경쟁이지만 교향악단은

자리나기도 쉽지 않고 그야말로 한번들어간 사람들은

정년 퇴직을 하거나 해야 비는 자리이고
자리가 나도 날고 뛰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인가 싶어서

마음이 몹시 무겁다.


중학교때 우리 학교에는 현악부가 있었다.

그당시 군산에 하나 있던 사립 초등학교를 나온 아이들은 바이올린이나 현악기를 배운 아이들이었고

1968년 생인 우리 또래들이 그당시에 군산에서 현악기를 실제로 본 일도 없었다.

나도 중학교에 올라가고 나서야 학교 연주회에서 현악부 아이들이 연주하는 바이올린을 실물로 처음 봤다.


흰 블라우스에 검정색 롱 스커트를 질질 끌며 연주하러 나오는 현악부 아이들이

얼마나 부럽던지

그리고 그 아이들이 연주하는 모차르트는 얼마나 멋있게 들리던지

하다못해 머리를 안감아서 떡이 져있던 음악선생님이 지휘하는 뒷모습도 멋있게 보이는 지경이었다.


아침 자습 시간이면 우리들은 칠판에 써있는 문제를 풀고 있었는데 현악부는 학교 귀퉁이에 있는 조립식 건물같은데서

아침 연습을 했었다.

자습을 풀면서도 정신은 현악부 연습실에 가 있었고

가끔은 질투심에 귀를 막아 버리기도 했다.

주로 학교 행사에 필요한 곡들을 연주하거나 아니면 모차르트를 연주했었는데

그때는 그 음악들이 모차르트인줄도 몰랐었는데

나중에 커서 보니까 그때 음악들이 모차르트가 대부분이었다.


큰 애가 아마 바이올린을 하게 된 배경에는 내가 눈뜬 최초의 질투심에서 유발했을지도 모르겠다.

현악부 아이들의 음악이 너무 좋았던 만큼

나는 차라리 질투심에 현악부 애들이 연주하는 합주를 듣고 싶지 않았을 때도 많았다.


큰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때

전주에서 제주도로  전학을 가서 학원이라고는 없던 애월 소길리에서

애월 납읍의 제주 시향 선생님 댁을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해서 배우던 바이올린이

 시작이었고

한 번도 쉰 적이 없이 온게 지금까지이다.


열심히 한 아이들에게 모두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세상이 어디 그러한가.


요즘처럼 큰아이 취업때문에 걱정이 될 때에는

그때 왜 바이올린 시작했나 그런 마음도 들고

하여간 자식은

"산너머 산"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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