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 생각났던 나의 선생님, 국민학교 1학년과 2학년 때 두 번이나 담임이셨던 '채경순 선생님'
나는 국민학교 1학년과 2학년 때 담임 선생님 이후로는 담임 선생님 복이 없었던 것 같다.
아마 이후로 만났던 선생님들이 대개 평타를 쳤더라도 채경순 선생님 같은 담임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내 기억 속 담임 선생님은 '채경순'선생님이 단연 최고였고 그분 덕에 체벌이 당연시되었던 1975년 대한민국 교육 현장에서 나의 3월은 따뜻했다.
시험지 뒷 면이 비치는 품질 나쁜 갱지 같은 종이는 부드럽지 못 한 연필 끝에 찢어지기도 했지만 1975년의 1학년 때도 시험을 봤는지 운동장에서 놀고 들어오면 간이 등사기로 빈 교실에서 시험지를 밀던 선생님이 계셨고 석유 냄새 같던 잉크 냄새가 났다.
저리 가 있으라고 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선생님이 롤러를 한 번 밀면 시험지가 복사기처럼 나오는 모습을 우리는 신기하게 구경 했고 내 기억 속 채경순 선생님은 우리들의 손바닥을 한 대도 때리지 않고 귀하게 여겨 주셨다. 그런 선생님이 딱 한 명을 울렸다.
우리반 은아.
시험 보기 전에 선생님이 이름 쓰는 괄호 안에 자기 이름을 쓰는 거예요. 개똥이, 아무개 이렇게 쓰면 됩니다.라고 하셨고 은아는 진짜로 자기 이름 대신 개똥이라고 썼다. 시험이 끝나고 선생님이 은아가 진짜로 이름을 개똥이라고 썼다며 웃으셨고 그래서 우리도 웃었고 은아만 울었다.
2학년 때도 담임이셨다. 나는 반 대표로 사생 대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수업이 끝난 후 선생님은 나를 남겨놓고 미술 자료를 보여 주면서 똑같이 그려보라고 연습을 시키셨는데 책 속의 집들은 모두 양옥집이었다.
우리 집은 슬레이트 지붕집이었지만 초가집이 아직도 마을에 있던 1975년 우리 마을에서 가장 잘 살던 집은 기와지붕집이었다.
마을에 양옥집 한 채가 지어졌다고 그 집 아줌마를 우리 모두 양옥집 아줌마라고 부르던 시절이었으니 선생님 보여 준 뾰족 지붕 프랑스풍 양옥집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이상한 집이었다.

선생님께 이런 집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더니 그럼 직접 봐야 된다고 선생님은 퇴근하면서 나를 도시의 선생님 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선생님 손을 잡고 기차를 타러 갔고 집에 아직 전화도 없던 때라 우리 동네 사는 아이에게 우리 엄마에게 가서 오늘 선생님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한 밤 자고 내일 함께 올 거라고 전달하라고 했는데 전달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갔고 엄마는 큰 딸을 잃어버렸다고 온 동네를 찾고 다녔다고 했다.
뾰족 지붕 집은 진짜로 거기에 있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선생님이 잘 보라고 했던 집들은 뾰족 지붕 집들이 었고 나는 양말을 신지 않고 있어서 선생님은 양말을 한 켤레 사서 신겨 주셨다.
선생님이 보여 준 집들은 삼각형 지붕의 근사한 집들이었지만 막상 가서 본 선생님 집은 남의 집 단칸방이던것같다. 작은 방의 아래에 선생님 남편이 누워 계셨고, 아마 아프셨던 것 같다.
선생님의 아기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작은 방에서 나도 한 밤을 자고 다음 날 다시 기차를 타고 선생님이랑 학교에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주인집도 아니었고 단칸방에 세 들어 살 던 집이었다. 미술 대회에 나가는 반 대표 아이가 뾰족 지붕 집을 한 번 도 안 봤다는 말에 우리 집에 가자, 앞 뒤 안 재고 데리고 갔던 선생님 덕분에 책으로도 보고 실제로도 봤던 삼각 지붕 집을 나는 잘도 그렸고 상품으로 27색 크레파스를 받았다. 왕자파스 12색이 100원, 그것도 제대로 들고 다니던 아이들이 없던 결핍의 시대에 부상으로 27색 크레파스는 우리 반 아이들이 모두 구경할 만큼 귀하고 멋진 상품이었다.
내가 선생님 집에 가서 잔 생애 최초의 외박은 행방을 알 수 없던 큰 딸에 대한 걱정과 집에 돌아온 다음 날은 양말도 신기지 않고 학교에 보낸 엄마였다는 자책감으로 엄마와 나에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사건이 되었다.
하지만 진짜 큰 사건은 다음에 일어났으니 선생님의 남편이 돌아가신 일이다. 시골 동네 작은 학교에서 선생님 남편이 돌아가신 일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나는 3학년이 되었고 채경순 선생님은 다른 학교로 가셔서 학교에서 볼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알토처럼 낮았고 둥글고 웃는 상이 었던 나의 선생님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봄 날은 그런 것이다. 시기가 짧고 그래서 더 귀하다. 그런 선생님을 이후로 만났던가.
절대로 만나지 못했다.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소리 지르고 때리는 그 시절 전형적인 선생님이셨고 4학년 때 담임은 봉투를 좋아했다. 엄마가 건네었던 촌지를 내 앞에서 입으로 후 불어서 게슴츠레 확인하던 눈빛과 우리 반 미선이를 울렸던 야비한 선생님이었다.
미선이네 아버지는 먼 지역의 국민학교 소사였다. 지금은 시설 주무관이라는 어엿한 직급의 공무원이지만 우리 때는 소사 아저씨라고 불렀고 학교 전설에 꼭 등장하는 중요 인물이었다.
소사 아저씨가 삽으로 승천하는 이무기를 죽여서 운동회 날에는 꼭 비가 온다는 전설의 소사 아저씨가 미선이네 아빠 직업이었는데 어린아이 마음에는 밝히기 싫었던 직업이었는지 미선이는 한 번도 아버지 직업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었고 가뜩이나 소심했던 다리가 불편했던 소아마비 친구였는데 그 아이를 담임이 울렸다.
엄마의 돈봉투를 볼 때처럼 야비하고 작은 눈으로 "너네 아빠랑 함께 근무했었다며" 우리 반 모두 앞에서 미선이 아빠는 소사 아저씨라고 했다. 이런 젠장 된장 고추장 같았던 선생님. 미선이는 울었고 그 아이의 울음은 이름을 개똥이라고 써서 우리 모두 웃었고 은아는 울었던 그 울음과는 다른 것이었다.
아무리 어렸어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 게 아이들이다. 미선이가 울 때 우리는 웃지 않았고 내가 느꼈던 것은 분노 같은 거였다.
은아가 울 때 우리가 웃었고 그것이 즐거운 기억이었다면 미선이가 울었던 것은 마음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창피한 아버지가 아니었을 텐데 담임이 그렇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채경순 선생님은 나중에 대학생이 되고서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아니 그전에 신문에서 한 번 만났다.
지역 신문에 전라북도 학력고사 수석 인터뷰가 실렸는데 채경순 선생님의 딸이었다. 인터뷰 기사에 어머니에 대한 글이 있었고 어머니는 '채경순 선생님'이셨다.
내가 선생님집 단칸방에서 잤던 그때 그 아기가 있었지는 않았고 다음 해에 태어나서 방학 때 선생님에게 쓰는 편지에 선생님 아기를 곰돌이로 그려서 보냈던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다음 해에 태어났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편지도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다.
칭찬을 많이 받았다. 칠판에 글씨를 잘 쓴다고 받았고 그림을 잘 그려서 칭찬, 미술도 잘 해서 칭찬. 선생님께 받은 건 칭찬과 사랑밖에 없는 것 같다. 손바닥 한 대 맞지 않고 1975년과 1976년을 보냈으니 그것은 기적아닌가.
시간이 그렇게 오래 지났어도 우연히 만난 채경순 선생님은 나를 금방 알아보셨고 너무나 반가워해주셨지만 어쩐지 나는 쑥스럽고 숨고 싶은 기분이어서 반갑게 인사하질 못했다. 선생님과의 만남은 그게 끝이다.
오래도록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나의 '채경순 선생님' 그 분은 나의 선생님이셨다.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집 앞 공원 (1) | 2026.05.11 |
|---|---|
| 새집 좋음 증후군 (2) | 2026.05.07 |
| 이제 사 정신을 차림. (3) | 2026.05.02 |
| 블로그 집들이 (2) | 2026.04.21 |
| 바닥공사 kcc 유레카화이트 3.2T (2) | 2026.04.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