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집이 최고! 금지!

나경sam 2024. 1. 8.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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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 호텔 근처에 있는 이자카야에서 마지막 밤을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던 "남자 놈들 환갑 파티"를 했다.
고등학교 3학년 1반 같은 반이었다는 교집합만으로 40년을 함께 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지간히 무던한 놈들이 만나서 이룬 교집합이지 싶다.
물론 그동안 멤버 교체도 있었다. 이혼해서 자진 탈퇴 한 사람, 친구 관계는 유지하되 자연스레 모임에서 탈퇴한 사람
그리고 돌아가신 임 석태씨까지 원 멤버였다.


임석태씨는 지병으로 일찍 돌아가셨지만 우리랑 같은 아파트 1층과 5층에 살면서 저녁밥을 함께 먹은 횟수가 정말이지 내가 우리 시부모에게 차려드린 밥상보다 더 많지 싶다.
석태씨 와이프는 직장 나가고 그 집 외동딸과 우리집 애들 셋이 24평 복도식 좁은 아파트를 뒤집어 놓으면서 놀면 
아무리 내가 육아의 달인이라 한들 오후가 되면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  그랬었는데 두둥 그런 시점에 등장하는
석태씨는 딸을 데리러 와서는 그냥 눌러 앉아, 저녁을 함께 먹었다.

세탁기가 두 대 있었고 건조대만으로는 빨래를 다 널 수 없어서 빨랫줄을 거실에 거미줄처럼 치고 살았던 시절이었는데 
남의 집 아이까지 맡아서 육아하면서 그 집 아이 아빠까지 함께 저녁을 먹었으니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아니라 
"5층 아저씨와 우리집"였었네.
 


낮에 실컷 놀다 간 것으로도 모자라서 저녁이면 또 등장하시는 석태씨
 
석태네: "띵동, 놀러왔어요. 이집이 24시간 열린다는 1층 그 집입니까"
우리: "네, 네 맞습니다.무한패쓰 받으신 5층이시군요.들어오세요."
거짓말은 1도 섞지 않은 진실의 진술 1.
낮에는 아이 아빠와 둘이 다녀 간 우리집은 저녁에는 퇴근한 부인과 함께 셋이 정답게 저녁 마실을 우리집으로 왔고
육아에 찌든 나는 꾸벅꾸벅 졸았지만 저녁 잠이 없던 그 집 식구들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우리집 거실을 나와 남편대신 지켰으며 내가 졸고 있어도 벌떡 일어나서 5층으로 후딱 가는 법이 없었다.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었던 거다.
 
진실의 진술 2. 어느 날 지금 하늘나라에 있는 병욱 엄마 집에 큰 맘 먹고 놀러 가서 시간보내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석태: "ㅅㅂ이 엄마, 오늘 저녁에는 뭐 해서 먹어요?"
나: "엄마가 보내 준 박대 구워 먹을거에요"
석태: "박대, 맛있쥬. 씁~.
함께 있던 병욱 엄마: "이게 지금 실화냐, 남의 집 남편이 너한테 전화해서 오늘 저녁에 뭐 해 먹냐고 물어본다는게"
그래, 나 실은 남자 둘 겆어 멕이고 있었어.  나야말로 씁-.-;;;

그렇다. 감히 내 남편도 못 물어보는 "오늘 저녁 뭐 먹지"의 간이 배 밖에 나온 진상 남편 멘트를 나는 돌아가신 석태씨에게서 들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진짜 남편과 저녁 밥 먹으러 온 가짜 남편 석태씨와 우리집 애들 셋에 그 집 딸, 나까지 식탁 의자가 모자라도 어떻게라도 해서 끼워넣고 함께 저녁밥을 먹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지만 그때는 그렇게 사는 것도 재미있었고 젊었으니 모든게 되던 시절이었다.


느리지만 유머가 있었고 천하태평이었던 석태씨는 내가 보기에 남편 친구들중에서 가장 느린 사람이었지만 하늘나라에는 가장 빨리 올라갔다.
제주도로 발령나서 이사간다고 했을 때 우리 시어머니 다음으로 섭섭해 한 사람이 석태씨였다.
아마 시어머니보다 더 섭섭했을지도 모른다.  "이사간다고오 하니까아 섭섭허다아"


지병이 있었다고는해도 마흔도 안 된 젊은 남자가 암도 아니었던 그 병에 죽는다는 것은 상상도 안되는 시절이었다.
늙어간다는 것 조차 상상이 안되는 철이 없던 나이였는데 제주도로 이사가서 짐도 다 풀기 전에 남편 친구들이 연락했다.
"석태 죽었어"
남편상으로 힘들 며느리 생각해서 삼일장이 아닌 하루만에 발인을 해버린 석태씨 어머니의 결단으로  우리는 제주도에서 장례식장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석태씨와 영원한 이별을 했지만 다섯살이었던 딸이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 어젯밤에 아저씨 꿈 꿨어" 그러는데 제주도에 들러서 우리 가족에게 손 흔들어주고 가셨구나 싶었다.
밥 해멕인 보람이 있었다. 살아서도 돌아가셨어도 우리집에는 들렀다 갔던 석태씨였다.


이혼한 놈, 자진 탈퇴 한 놈, 돌아가신 석태씨까지 세 명이 더 있었다면 9팀이었을 모임 구성원이었지만
살아남은 6팀은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일 년동안 모아두었던 넘치는 엔화를 마음껏 써가면서 좋은 호텔에서 자고 먹고
3일동안 술을 마셔가면서 본인들의 환갑 자축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모두 지금까지 남아서 함께 갔더라면 좋았을텐데
이혼한 놈, 자진 탈퇴한 놈은 그렇다 쳐도 내 손으로 밥 해멕여서 그런지 석태씨가 잠깐 생각나는 아침이다.
 
하지만 징글징글한 놈들이다. 3일 연속 술이라니!! 
 
재미있었고 편했다. 일본 여행은 자유 여행이 전부였는데 처음으로 패키지 여행을 해서 이동이 편했고 호텔이 고급져서 돈 처바른 보람이 있었다. 역시 원이든 엔이든 돈은 있고 볼 일이다.
일본어가 되니 술집가서 사장이랑 떠들면서 술 시켜주는 재미도 있었고 물건 살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계산해주는 남의 돈 쓰는 재미또한 오졌다.
 
여행 금지어. 집이 최고!는 안할란다.
왜냐고?? 저는 미쳤습니다. 오늘 하루만 집에서 쉬다가 내일 새벽에 또 공항에 나갑니다.
스페인에 가거든요. 생전 처음 길게 비행기 타고 떠납니다. 이러려고 저는 일 년동안 때로는 맘 상해가며, 때로는 욱해가며 일했습니다.

대학 동기 네 명과 떠나는 오십 여섯 기념 여행.
일본 짐 풀었던 만나리나덕 백팩에 다시 7박 9일짜리 여행 짐을 쌀 것이다.
삼겹살도 사 놓고 감자탕도 끓여놓고 갔지만 감자탕은 상해서 버렸고 고기도 변색해서 버렸다는 아들 통신을 들으니
에라이-.- 자식들 밥 걱정한 내가 바보였구나^^;;; 알아서 밖에서들 잘 먹고 다니는데 이번에는 부엌을 정리하고 냉장고는 비우고 떠날란다.
집이 최고!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