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팥붕, 덕수궁
10월이 바빴다. 성음악 축제나간다고 노래 연습하고 긴장하면서 준비했던 시간들이 지난 주까지 지나가고 나니
이번 주말은 휴가얻은 군인같은 마음, 그래 나 휴가 받았다. 남편 데리고 가는거야. 서울!!
먼저 팥붕이 싸다고 소문 난 우리동네 시장에서 올 들어 첫 붕빵, 팥붕으로 개시

분명한 취향이다. 슈붕말고 팥붕. 팥 좋아하는 건 아마도 유전이지. 아버지도 좋아하셨던 팥.
이성당 빵은 열 개, 스무개를 사와도 모조리 단팥빵이었던 우리 아부지. 팥매니아셨다.
나도 양갱부터 단팥빵까지. 팥으로 된 모든 것은 좋아함---- 유전의 힘! 무섭다.
남편도 팥으로 빚어진 인간을 골랐나. 아니다. 사람 맞긴하다.
말이 필요없다. 가을 덕수궁. 도심 한복판에 시간을 거슬르는 건축물이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경복궁, 예원학교, 이화여고, 고종의 길. 정동 제일 교회
대로변에서는 대통령 꺼지라는 탄핵 집회가 열리고 있었지만 경복궁 뒷 쪽 오래된 건물들은 세상 일에 관심없는 듯 무심하게 나이를 먹어 가고 있다. 그게 좋다.

덕수궁 뒷 쪽에 고종의 길이라는 작은 산책로도 가보고 남편과 나는 토요일에 이만보를 걸었다.
시간이 멈춘 건축물들이 지금의 사람들과 공생하는 곳, 덕수궁 길이 그래서 좋다.
고종의 길이라는 좁은 산책로도 걷고, 예원학교 정동 제일교회 이화여고를 끼고 다시 내려와서 남대문 시장을 갔다.
4학년때 취미로 배우게 했던 둘째의 클라리넷은 6학년 때 전공으로 진로를 정하게 됐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 방과 후 수업에서 클라리넷을 가르치던 특기적성 강사가 나한테 전화를 했었다.
강사A : 어머니, 저런 아이는 무조건 전공시켜야 됩니다.
이미 큰 애도 바이올린 전공할 예정을 렛슨받고 있을 때라 결심이 쉽지 않았다.
돈이 가장 큰 문제고, 재능만 있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 운도 있어야 되고 대학가기는 공부보다 더 어려운게 대한민국 예체능의 현실이니 애가 셋이나 있는 우리집에서 부자 할아버지, 할머니도 없이 결심은 쉽지 않았지만
어느날 둘째는 편지 한 통을 써서 나한테 주었다.
"엄마가 힘든 건 알지만 가르쳐만 주면 서울대를 가겠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에 써 준 둘째의 편지가 진짜가 되는 데
8년이 걸렸다.
예중 시험부터 보고 생각해보자 했을 때 예원학교를 보게 하려고 원서를 받으러 둘째와 예원학교에 왔었다.
교문을 폴짝 뛰어 넘어가면 합격한다는 말도 안되는 뻥을 쳤더니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교문을 폴짝 넘던 둘째였다.
예원 시험은 여건상 접고 가까운 계원 예중 시험을 보고 합격했지만 사실 그때부터 저나 나나 고생길이었고
악기가 무거운 만큼 아이의 어깨는 앞으로 쏠렸었다.
덕수궁 돌담길, 예원학교를 지나오면서 그때 생각이 잠시 났다.
더딘것 같은 시간도 언젠가는 이렇게 흘러 옛 이야기 하는 날이 오는 게 진리다.
내가 남편에게서 좋아하는 점이 있다면 그건 절대 외모가 아닌 그의 유머 코드다.
돌아오는 길에는 용산역에서 수원까지 기차를 탔다.
어디에서 기차를 타야 되는 지 안내 전광판을 보고 찾아야 되는데 남편은자꾸만 티켓을 보면서 몇 번 홈에서 타는지 확인하려고 하는 거다.
나 : 도대체 왜 그래. 당신 북한에서 왔어. 비행기 타는 것 처럼 저기 저거 전광판 보고 찾는거지.
남편: 목선타고 넘어 왔습니다.
목선이라는 말에, 웃겨서 용산역에서 떼놓지 않고 함께 기차 타고 돌아왔다.

남편과 함께 이만보 걷고, 말은 사만 마디 쯤 한 주말
완벽한 힐링캠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