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K 아부지

나경sam 2023. 9. 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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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K 장남이었다가 지금은 K 아부지 된 지 오래다.

지금까지 K 장남이었다면 아마 나는 이혼했을텐데 다행히 대문자 케이 장남에서 소문자 케이 장남의 시절을

거치더니 어느새 앞에 달고 있던 소문자도 떼서 버려 버렸다.

언제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버렸다.

감춰두고 있는 마음이 있는지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시부모님의 자식보다는 애들 아버지와 내 남편의

입장이 많게 되버렸다.

그래도 한국 남자들에게 K 장남도 힘들긴 하지만 K 아부지 노릇도 쉽지는 않다.

이래저래 불쌍하긴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애 셋을 키우면서 남편도 나도 어른이 됐고 부모가 됐다.

큰 애는 큰 애라서 힘들었고 둘째와 셋째는 초특급 울트라 연년생이라 힘들었다.

함께 밤 잠 안자고 키워줬고 중요한 성장 과정에 기여한 공이 컸다.

자전거, 유모차, 브레이드, 붕붕이

바퀴 달린 것들은 모두 지 애비가 가르치고 밀어줬다.

큰 애 유모차

리틀타익스 붕붕이에 재미 붙였던 네 살이었던 큰 애를 선화동 언덕배기를 바퀴소리 내면서 밀고 다니던 아빠였고

64년생 놈들 중에서는 그런 점에서는 촌 놈같지않고 세련미가 있었다. 서울 아빠처럼 말이지 

부부 모임에 함께 가면 밤 잠 안자고 육아에 동참하는 남편은 우리집이 유일했다.

64년생 남자 놈들, 그땐 그랬다.

 

 일요일이면 선화동 언덕길도 바퀴소리 요란하게 붕붕이를 밀면서 언덕길 롤러코스터를 태워줬다.

그래서 큰 애는 지 아빠랑 분리불안같은게 있어서 출근하면 목 놓아서 울었었다.

네 살때까지 아빠가 출근하면 울었었는데 이제는 출근하는지 들어오는지 나가는지도 모르고 잔다. 쿨쿨

서른 다섯 살 남편과 네 살 아들

 

둘째 셋째 연년생 유모차

연년생 쌍둥이 유모차에 아이들을 밀고 다니다가 유모차 졸업할 무렵 롤러 브레이드를 가르쳤고 큰애부터 셋째까지

자전거 뒤를 잡고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두 발 자전거를 가르쳤다.

다행이 세 아이 모두 운동신경이 있어서 지 애비 크게 고생 안 시키고 바퀴달린 것들과 금방 친해졌지만

놀이터에서 모래놀이 할 때도 애비를 옆에 끼고 다니기 좋아했던 두 딸들 때문에 한때 전주 아중리 부영 아파트에서는

다른 집 남편들이 욕을 단체로 먹었을 것이다.

 

그때는 희안하게 그런 아빠들이 드물었다, 아니 없었다.


음악하는 애들때문에 운전할 일이 다른 집 아빠들보다 더 많았고 힘들었다. 

남편도 나도 개고생을 해가면서 서울 길을 누비고 다니면서 애들 가는 곳에 기사처럼 운전을 하고 살았었다.

해방이 되어서 서울 구경 다니기 시작하면서 사람답게 산 적이 사실 얼마되지 않았을만큼 힘들었다.

 물론 지금도 완전히 놓여난것은 아니다.

지방 연주 갔다가 새벽 세 시에 도착해도 거기가 어디래도 남편은 간다.

물론 나는 잔다.

술 마시고 놀다가 차가 끊긴다고 해도 간다. 지독한 아빠다.

 

그래서 K아빠는 불쌍하다.

세 시에 데려다 놓고 열두시에 데려다 놓고 사당이든 죽전이든 어디든 가서 자식들을 집에 데려다 놓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집에서 가까운 수원역에 갈 때 다들 자느라 태워다 주질 못해서 버스타고 간다.

그게 아부지고 아빠다.

불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