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온 것같다.
쓰라는 유로는 반도 못 쓰고
710유로 중에서 반 이상을 남겨왔다.
돈도 써본놈이 잘 쓴다는 걸 알게 됐네!
프랑스 어느 기관을 방문하고 받은 에코백과
노트, 파커 펜, 물통
자기 돈으로 산 코코아, 아이크림,국화차,립밤
둘이 마시면 좋겠다고 사 온 머그 잔
안 사왔더라면 쫓겨났을 와인 한 병을 들고 집에 왔다가
여행갔다온 날수에 조금 모자라게 집에서 쉬었다 간
섭섭씨 덕분에 연휴가 끼어있던 지난 주
밥을 한 달 분량은 하고
와인도 세 병은 마셨다.
어쨌거나 섭섭과 나는 취향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달라서
여행가면 물건사기 좋아하는 나랑은 달라서
꼭 필요한 물건 아니면 사질 않는다.
나였더라면 가방이 터지게 사왔을텐데
섭섭은 돈도 다 못쓰고 남겨왔으니
인생이 섭섭할만도 한데
언제나 이만하면 됐다한다.
눈은 작으나 대인배임에 틀림없다.
카스를 들어가봤더니 승범이 고등학교 때
은지니 중학교 때 교복을 다려서 보면대에 걸어두던
섭섭이의 예전 행적들이 드러났다.
계원예중 교복 주름치마를 칼각을 잡아 다리면서
주름도 많다던 섭섭이의 독백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는
계원예중 교복 치마는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희망라사집 큰 아들답게 다림질의 고수여서
결혼하고 남편의 와이셔츠나 아이들 교복을 다려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애들 교복을 정성으로 다리면 아이들이 그 옷 입고
나쁜짓을 하지 않을거라는 혼자만의 믿음같은게 있었는지
하여간 아이들 교복을 정성으로 다려줬다.
나는 거의 안다렸던것같다.
수민이가 경기 체중, 체고를 다녀서 교복이 체육복이어서
수민이 교복을 못다려입히는게
섭섭하다는 섭섭이였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저녁 와인 한 병을
은진이, 나, 섭섭
간단하게 비우고
안젤라와 프란치스코의 축일에
은지니와 승버미가 선물로 받아 온
마주앙 미사주 두 병도 한자리에서 비우고
일주일에 와인 세 병을 뿌셔버렸다.
마주앙 미사주는 일반 마주앙과 다른 맛이 있어서
와인 병 여는 순간 다 마셔버릴 수 있는 맛이다.
대구 칠곡성당에서 세례받을 때
대부 대모 서 줬던 분들
어디선가 잘 살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아이들 세례명 지어서 편지로 보내준
내 친구 혜숙이
막달레나 수녀님
한 번은 보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 가을이라 그런가보다.
이 때도 가을이었다.
혜숙이가 살레시오 수도회에 들어가기전
둘이 마지막으로 여행을 갔던 바닷가에서
혜숙이가 비싼 카메라로 찍어줬던 사진이다.
스물 일곱 가을이었다.
혜숙이는 자기가 갖고 있던 비싼 카메라를
의사 오빠에게 주고 수도회에 들어갔다.
수녀원 들어가는 혜숙이에게 나는 마지막
선물로 뭘 줬는지 기억도 안나지만
혜숙이는 우리 애들 세례명 지어주고
나에게는 자기 세례명을 주고
편지랑 책도 보내주던 착한 수녀님이었다.
쉰 다섯이 되었다.
만 나이는 쉰 넷이니 저 사진을 찍었을 때만큼
더 살았고 저 얼굴은 이제 사진으로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
스물 일곱 두 바퀴를 돌았다.
스물 일곱에 결혼
스물 일곱해를 더 산 오늘까지
자식을 셋 낳았고
대학교를 모두 졸업시켰다.
그러느라
섭섭이는 퇴직이 가까워진 나이가 되었고
나는 사진하고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갱년기 아줌마가 되었다.
이제서야 시간이 나서
합창단에도 나가고
레지오 활동도 하고
저녁을 안차려도 되는 날이 많아졌다.
늙는다는게 꼭 나쁜 것만도 아니지 싶다.